▲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이상현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분묘 형태로 안장되어 있다.
김학규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이상현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분묘 형태로 안장돼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약 5만 명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포항지역을 비롯한 각 지구 전투에 투입된다. 이들 중 7000여 명이 전사했다.
이곳에 모셔진 48위는 당시 포항전투에 참전한 71명의 중대급 학도의용군 중 인민군 전초부대에 맞서다 전사한 48명이다. 이들 48명의 무덤은 원래는 포항여중 부근에 가매장돼 있었다. 1963년 9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국군묘지 안장을 의결하면서 1964년 4월 25일 대한학도의용군 동지회 주관으로 국군묘지 제5묘역으로 이장했따. 이어 1968년 4월 지금의 자리에 다시 이장하게 되었다.
이 탑은 1954년 10월 30일 건립 당시에는 이름이 '무명용사비'였다. 1956년 1월 16일에는 대표 무명용사 1위를 이 비에 안장하면서 '무명용사탑'으로 개칭됐다. 오늘날과 같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바뀐 것은 1968년 4월의 일이다.
이때 대표 무명용사 1위를 납골당으로 이장한 후 무명용사탑을 현 위치로 옮긴 다음, 포항에 있던 학도의용군 전사자 48위를 제단과 함께 이 탑 뒤쪽 반구형 석함으로 이장하면서 묘는 '학도의용군의 묘'라 표기하고 탑의 명칭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바꿨다.
이 탑은 3개의 아치형 문형으로 구성돼 중앙의 큰 문형 속에 무명용사탑이 세워져 있고 탑 뒤쪽 중앙에는 사각의 화강암 석함으로 된 반구형의 분묘가 설치돼 있다.
영화 <포화 속으로>(2010)는 포항지구 전투에 참전한 학도의용병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들은 과연 전쟁 영웅이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만 17세 이하의 소년·소녀병은 2만9603명(이중 소녀병은 467명)에 달했다. 이중 2573명은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도 이와 비슷한 규모의 소년·소녀병에 비슷한 규모의 전사자를 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참전한 경우도 있었지만,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허다했다. 무력으로 분단상황을 극복하겠다는 헛된 꿈은 이렇게 남과 북의 어린 소년·소녀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도 모자라 끝내 수많은 목숨마저 빼앗아 갔던 것이다.
당시 소년·소녀병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어머니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남긴 채 끝내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당시 동성중 재학생)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편지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앞에 함께 전시된다면 전쟁의 참상을 보다 생생히 전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배우는 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참고로 이우근의 편지글은 2009년 포항시 용흥동 전몰학도충혼탑 광장에 '이우근 편지비'로 새겨졌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이제 우리는 '육탄10용사 현충비'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서 상투적으로 이들의 위용을 칭송하기 보다는 다시는 이런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하여 고귀한 생명을 더이상 잃지 않도록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현충문에 숨어 있는 분단의 역사

▲헌충문 폭파기도 사건을 보도한 언론기사(<동아일보>, 1970. 6. 22) 1970년 정부 대간첩본부는 “6월 22일 새벽 3시 50분경 북괴 무장공비 2-3명이 서울 영등포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침투, 현충문의 폭파를 기도했으나 실패, 그중 1명이 폭사하고 나머지 잔당은 도망쳤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
1970년 정부 대간첩본부는 "6월 22일 새벽 3시 50분경 북괴 무장공비 2~3명이 서울 영등포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침투, 현충문의 폭파를 기도했으나 실패, 그중 1명이 폭사하고 나머지 잔당은 도망쳤다"라고 발표했다.
이 신문은 "이들은 현충문 오른쪽 지붕에 로프를 걸고 올라가 지붕 밑에 폭발물을 장치하려다 잘못 다루어 폭발, 무장공비 한명은 현충문 왼쪽 30m 지점에 날아가 폭사했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현충문 앞에서는 6월 25일 '6.25 20주년 기념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자칫 1983년의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13년 앞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먼저 발생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이들 아웅산 테러 사건의 희생자들은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돼 있다).
이 현충문 앞 폭파 미수사건이 있었던 1970년은 베트남전이 한창인 시점이었다. 2년 전인 1968년에는 북한 특수부대의 1.21 청와대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도 했다. 반대로 한국군에 의해 북의 원산에서 인민군의 사단장 '목이 날아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년 후인 1971년에는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던 실미도 부대가 실미도를 탈출해 대방동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이래 남과 북의 적대적 긴장관계가 최고조에 달해 있던 시절 발생한 사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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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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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편지가 현충원에 전시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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