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2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경향신문
'다시 안기부에 내려보내겠다'는 검사
검사를 만난 그는 "내가 안기부에서 작성한 자백서는 고문을 당해 작성한 것으로 모두 거짓이다,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검찰과 법원이 억울함을 밝혀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검사는 "간첩새끼야, 한번만 더 헛소리를 하면 다시 안기부에 내려보내겠다"고 그를 협박했고 그가 안기부에서 자백한 내용 그대로 피의자신문을 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검사실에 있던 젊은 여자가 그가 안기부에서 진술한 것을 그대로 타이핑했고, 그 종이에 그가 서명을 한 뒤 조사가 끝났다고 했다. 그는 안기부에서 50일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희망을 그때 모두 버렸다고 했다. 당시 그가 수감되어 있던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는 난방이 되지 않았고, 그가 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갔을 때 그의 얼굴 한쪽은 고문을 받아 생긴 상처에 피가 엉겨 붙어 누더기처럼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고문을 당한 상태였고, 법정에서 변호인들이 그가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1심부터 대법원까지 1년여간 재판을 받는 동안 재판에 관여한 판사들 중 누구도 그에게 고문 당했는지 묻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판사들은 그에 대한 체포영장이 없었고, 그가 구속된 날과 구속영장이 발부된 날이 전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불법구금에 대해서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그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간첩이라면서 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그는 1993년 5월 27일 가석방으로 출소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생활 중 3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재판을 받는 동안 그의 아내는 충격을 받아 뇌출혈로 쓰러졌고, 자식들은 간첩의 자식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신문과 방송에서 재일동포간첩단 사건이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그의 사진이 매일같이 신문과 방송에 나와서 가족들은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출소한 뒤에도 그는 보안관찰법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2009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을 결정하기까지 그는 재일동포간첩단이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에도 불구하고 법원, 검찰, 국가정보원 누구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11월 29일 마침내 대법원은 그가 불법구금되어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았고, 안기부 수사관들의 위와 같은 행위는 형법 제124조(불법체포, 불법감금)를 위반한 것이고 그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