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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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4월 베토벤은 첫 아카데미를 열었다. 아카데미는 수익을 연주자가 가져가는 대중 연주회를 뜻한다. 그리고 그가 음악을 쓴 발레 '프로메테우스의 창조'가 1801~1802년 사이 23번 공연되었고, 외국 출판업자들 사이에서까지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의 판본이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국제적인 위상도 올라갔다. 이즈음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 다음은 그가 1801년 절친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중략) 그러나 시기심이 많은 악령인 내 건강이 나의 수레바퀴에 악랄한 바퀴살을 찔러 넣었네. 사실인즉 이런 것이네. 지난 삼 년 동안 내 청력이 점점 약해졌어. (중략) 거의 2년 전부터 나는 사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아.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나는 귀가 먹었어. 내 직업이 다른 것이라면, 이런 질환을 가졌더라도 지장이 없겠지. 그러나 내 직업에서는 끔찍한 장애일세." (중략)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이 시기에 베토벤은 엄청난 창작열을 보여준다. op. 18 현악 사중주 여섯 곡, op. 21 C단조 피아노 협주곡, op. 36 교향곡 2번 D 장조 등등 명곡을 무수히 발표했다. 건강도 살짝 좋아지는 듯했고 친한 친구들도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1802년 베토벤은 다시금 불안에 사로잡힌다. 청력 문제는 더 심각해졌고 아카데미를 열기 위한 궁정 극장의 대관은 다른 수요에 밀려서 허가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황실 궁정에 서곡을 몇 개 헌정했지만, 영구적인 궁정 음악가의 직위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것에 대해 그는 작곡가인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제의 도시에 불한당이 있는 것처럼 황실 궁정에도 그런 자들이 있네"라며 분노했다.
예민해진 베토벤에게 담당 의사인 슈미트 박사는 시골에서 조용히 지낼 것을 권했고, 베토벤은 다뉴브 강변 하일리겐슈타트의 조용한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해 10월 그는 그곳에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로 알려진 유명한 글을 썼다.
이는 베토벤의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다행히 그가 자살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이 글에는 청력 손실로 인한 좌절, 그로 인한 음악가로서의 고통, 사회적인 교류에 대해 거의 공포스러울 지경인 그의 속사정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의 힘으로 여기까지 버텨왔으나 이제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과 형으로서 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중략) 내가 죽으면 그 즉시, 만약 슈미트 박사가 아직 생존해 있다면 나를 대신하여 그에게 내 병에 관해 물어보고 이 글에 내 질병의 진단을 붙이도록 하라. 그래서 적어도 내가 죽은 뒤라도 세계와 내가 화해하는 것이 가능해지도록. 동시에 나는 너희 둘을 나의 적은 재산의 상속자로 선언한다. (중략) 안녕, 내가 죽더라도 나를 아주 잊어버리지는 말아라. 그럴 만큼의 자격은 있으니까. (중략) 행복해라……."
하지만 베토벤은 유서를 작성하면서 부활했다. 그런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는 대신 맞서 싸우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베토벤의 부활은 베토벤을 진정으로 위대한 음악가로 만들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 역경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매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후 폭포수처럼 오페라, 현악 사중주, 피아노 소나타, 교향곡들을 줄줄이 탄생시켰다.
베토벤이 보청기를 사용한 것은 1816년부터이고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진 것은 1817년 즈음이다. 대화 수첩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181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10년이다. 오른쪽 귀는 완전히 청력을 잃었지만, 왼쪽 귀를 의지해 1820년대에도 간신히 소리를 듣기는 했다. 그러니 베토벤의 청력이 1800년부터 급격히 쇠퇴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부풀려진 면이 있다.
베토벤은 유서에 "내가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면, 불같은 공포감이 엄습하고 내 상태가 알려지는 위험에 노출될까 봐 두려워진다"고 썼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오로지 음악으로 채워 넣었다. 1816년 그의 일기에는 "오로지 너의 음악 속에서 살아라. 너의 감각은 너무나 제약되었으니까"라고 써 있다.
'영웅 교향곡'에 담긴 속사정
한때 베토벤은 빈을 떠나 파리로 갈 계획을 세웠다. 빈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출판사와의 소송, 빈 극장 운영진과의 갈등으로 인한 계약 무효 등으로 불만이 쌓였다. 그 무렵 사랑했던 여인 줄리에타 귀차르디가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한다는 사실도 그의 등을 떠밀었다.
베토벤은 황제가 다스리는 세상이 가고, 민중이 중심이 된 국가를 꿈꾸며 나폴레옹이 그 꿈을 이뤄주리라 생각했었다. 이때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는 나폴레옹을 모델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