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 신사의 2020년 1월 1일 풍경. 박광홍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들로는, 백제부흥운동을 지도한 부여풍(풍왕)과 당나라에 의해 옛 백제지역의 관리자로 세워진 웅진도독 부여융이 유명하다. 이들은 각각 백제부흥운동의 실패와 나당전쟁의 신라 측 승리로 백제땅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 외에도, 이국 땅에서 고국 백제를 그리던 또 한 사람의 존재가 역사에 전해진다. 일본으로 도래하였던 부여선광(扶餘善光)이다. 부여선광은 백제의 왕족으로 의자왕의 아들, 혹은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부여풍의 아들로 전해진다. 어느 쪽이든 의자왕의 직계자손인 셈이다.
일찍이 부여풍과 함께 일본으로 도래하였던 부여선광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부여풍이 백제부흥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면서 귀국했을 때에도 함께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잔류하였다.
663년 백제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출병한 일본군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강(일본식 표기 백촌강)에서 궤멸되고 백제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듬해 많은 백제난민들이 일본 나니와 일대(현 오사카)로 피란하였는데, 일본 조정은 나니와에 부여선광의 봉토를 마련해주고 이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후 부여선광 일족은 693년 일본 조정으로부터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즉 백제왕씨라는 성을 사성받았으니, 백제왕 신사는 부여선광을 위시한 백제 피난민들의 생생한 흔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