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고, 인생을 살아봐서 다 안다고 말하는 아빠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아기 코끼리를 쇠사슬에 묶어놓으면 나중에 몸집이 커져도 쇠사슬을 뽑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아기 코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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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말에 의하면 '능력이 있는 남자들은 맞벌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취직하지 말고 꽃집을 하다가 결혼하면 된다고 했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었나?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고, 인생을 살아봐서 다 안다고 말하는 아빠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아기 코끼리를 쇠사슬에 묶어놓으면 나중에 몸집이 커져도 쇠사슬을 뽑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맞다, 나는 아기 코끼리였다.
대학교 첫 번째 성적표가 날아왔다. 성적 우수자로 등록금 면제. 잘못 배달된 게 아닌가 봉투의 주소란을 확인했다. 정확히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었다. 1학년 학생들, 특히 입대를 앞둔 남학생들의 힘이었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를 사귀어볼 심산으로 공대에서 개설하는 교양강좌를 많이 신청했다. 애인은 못 만들었지만, 그것이 의외의 결과를 만들었다. (나의 연애 사업에 관심이 없는) 아빠는 만족스러워했다.
반면 나한테는 소득이 없었다. 애인도 없고, 장학금 중 얼마를 나한테 떼어주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불공평하게 살자'가 가훈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참다못한 내가 말했다.
"반수를 해야겠어요. 약대나 한의대를 가려고요."
"네가 아들이라면 몰라도 딸을 그렇게까지 지원해줄 수 없다."
22년 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상황이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 나한테는 가슴에 사무치는 말이었다. "딸을 유학까지 보내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 된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다." 아빠가 한 말이었다. 우리 집 형편이 어렵다고 했다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들어온 아들과 딸의 차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또다시 가로막혔다.
'엄마', '아내', '며느리', '여자' 이런 틀에만 끼워 맞추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빠를 이해하게 됐다
이후 나는 실로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나이트클럽을 갔다. 자취하는 친구 집에서 합숙 생활을 하며 학교는 가지 않았다. 시험을 치지 않아서 학사경고를 세 번(일명 쓰리고) 받기도 했다. 제적을 당할 위기에서 구사일생, 우여곡절을 겪고 졸업을 했다. 내가 졸업을 하게 과정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는데, 언젠가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