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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 붕괴 직전, 크렘린궁 막전막후

[북리뷰] 옛 소련 붕괴 과정 묘사한 마이클 돕스 '1991'

등록 2020.04.22 11:51수정 2020.04.2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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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소련과 냉전체제 붕괴를 주제로 한 마이클 돕스의 <1991>

옛 소련과 냉전체제 붕괴를 주제로 한 마이클 돕스의 <1991> ⓒ 모던 아카이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정국상황에 따라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을 마칩니다."

1991년 12월 25일 오후 7시 옛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고별 연설이다. 이 연설이 끝나고 30분이 채 되지 않아 크렘린궁에 펄럭이던 구 소련의 붉은 깃발은 내려가고 러시아 국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이클 돕스는 1981년부터 1995년까지 미 <워싱턴포스트>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내며 옛 소련과 공산권이 몰락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소련 해체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면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일 것이다. 이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탱크 위로 올라가 대국민 호소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때 돕스는 현장에 있었다. 

돕스는 자신이 목격한 냉전해체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 결과물이 이제 소개하려는 책 <1991>(원제 : Down With Big Brother, 모던 아카이브 펴냄)이다. 이 책은 옛 소련 해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이 책의 강점은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 ▲ 개혁가 고르바초프의 등장 ▲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이른바 '스타워즈' 전략 ▲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 등 옛 소련 붕괴를 전후해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국제정치의 변곡점이나 다름없었던 당시의 사건을 흡사 대하소설처럼 써내려 간다. 이 대목에서 미국 저널리스트의 저력을 실감한다.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함께 한 뒤 <중국의 붉은 별>이란 역작을 남겼다. 이에 앞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존 리드는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직접 목격한 뒤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썼다.


좀 더 가까운 과거에서도 미국인 저널리스트의 활약은 빛난다.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에서 1945년 해방과 분단, 1950년 내전 뒤 상이한 길을 간 남북한의 역사를 추적했고, 셀릭 해리슨은 <코리아 엔드게임>에서 북핵을 둘러싼 북미-남북의 외교적 딜레마를 분석했다. 

마이클 돕스는 <1991>에 앞서 쿠바 미사일 위기를 주제로 <1962>(원제 : One Minute to Midnight), 그리고 얄타회담 막전막후를 다룬 <1945>(원제 : Six Month in 1945)를 잇달아 출간했다. 이 책 <1991>로 돕스는 냉전 삼부작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돕스의 성취는 선배 에드가 스노우나 존 리드, 돈 오버도퍼, 셀릭 해리슨 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옛 소련 붕괴를 이야기하는 건 얼핏 생뚱맞아 보인다. 옛 소련 붕괴 이후 국제정치는 이 사건에 주목해왔고, 학문적 성과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어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주제는 관심을 끈다. 

오늘의 러시아는 고르비·옐친이 꿈꾼 조국이었을까? 

무엇보다 <1991>은 무미건조한 거대 국제정치 담론이 드러내지 못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크렘린 이너서클에서 벌어지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권력암투는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 한다.

고르바초프가 개혁의 빗장을 열어 젖혔다면 옐친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소련 구체제를 무너뜨렸다.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라면 고르바초프가 공산당이라는 기존 체제 안에서 개혁의 과업을 수행하려 했던 반면, 옐친은 아예 새 판을 짜려 했다는 점이다. 
 
"옐친은 자신의 정치스타일과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과거 후원자였던 고르바초프와 차별화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 (중략) 스타일과 성격 보다 훨씬 큰 차이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 즉 '공산주의는 끝났는가?'란 질문에 대한 태도였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란 단어를 재정의해서 그 의미를 많이 퇴색시키려는 의지는 있었어도 공산주의 이념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중략) 반면 옐친은 고통스럽고 공개적인 전향과정을 겪었다. 공산당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에 자극을 받아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신념을 재검토하고 더 이상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본문 457~458쪽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과정이다. 옛 소련은 사회주의 정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후 10년 동안 그곳에서 발이 묶였다. 

브레즈네프가 벌인 전쟁은 고르바초프에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이 전쟁을 인정하지 않았고, 참전 용사는 버림받은 사람 취급받았다. 1만 5천 명의 병사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옛 소련군의 마지막 사령관 보리스 그로모프 중장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는 장면에선 비통함마저 느껴진다. 
 
"제40군 사령관은 아무도 들을 수 없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회주의의 대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후진적이고 외국 침략자와 싸운 긴 역사를 가진 산악국가로 소련 청년 100만 명을 보낸 지도자들을 가차 없이 저주했다. 그러고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한 장병 1만 5000명의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다." - 본문 338쪽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약화를 가져온 중요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경험과 유사점도 없지 않다. 특히 미국은 아프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고자 공작을 벌였다. 

하지만 이 전쟁의 흑막은 국내에 잘 알려진 바 없다. 이뿐만 아니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의 마지막 순간도 소개한다. 우리에겐 이 사건은 비극으로 남아 있다. 저자 돕스는 어쩌면 단편적일 수 있는 사건에서 소련 체제 붕괴 원인을 발견한다. 
 
"이 사건은 수십 년간 자발적 고립이란 곁길로 새게 한 체제, 반대 의견을 억누르고 새로운 도전을 유연하게 다룰 능력이 없는 체제, 상식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체제의 총체적 우둔함을 보여줬다. (중략) 소련 체제는 너무 막강하고 너무 단단하게 뿌리내러서 그 그늘 아래 사는 사실상 모든 이들을 마비시켰다." - 본문 159쪽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책의 강점이 빛을 발한다. 즉 KAL 007기 격추, 아프간 침공 외에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 베를린 장벽 붕괴 등 옛 소련 붕괴를 둘러싸고 벌어진 굵직한 사건을 마치 드라마처럼 묘사하면서도 역사적 맥락을 적절히 뒤섞어 공산체제 붕괴 원인을 설명하는 게 큰 강점이라는 말이다.

이 책은 냉전 붕괴를 전후한 국제정치에 관심 있는 독자나 연구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텍스트라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비록 고르바초프가 기존의 구체제 안에서 개혁과 개방을 추구했지만, 그의 개혁 정책은 그간 정치적 금기였던 '자유 토론'을 가능케 했다. 돕스는 당시의 풍속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토론의 시대'는 인구 2억 8000만의 나라를 사실상 마비시킨 말의 홍수 형태로 나타났다.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이 13일간 그때껏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언론 자유 축제에 참여했다. 칼리닌그라드에서 캄차카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의 광부, 공장장, 정부 관료가 크렘린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보느라 산업생산량이 급감했다. 토론은 TV로 생중계되어서 정부의 검열 문제가 없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본문 370쪽
 

고르바초프가 열어젖힌 '토론의 시대'는 민주화라는 거대한 엔진을 돌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옐친은 도도한 시대 흐름에 제대로 올라탔다. 고르바초프가 기본 전제를 잘못 설정했다 하더라도, 낡아빠진 공산주의 체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점만큼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자유 세계는 고르바초프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1991>을 읽고 난 뒤 오늘의 러시아를 다시 생각해 본다. 2021년은 옛 소련 붕괴 30주년을 맞는 해다. 지금 러시아는 어떤 모습인가? 옐친 이후 혜성처럼 등장한 전직 KGB 요원 블라디미르 푸틴은 장기집권을 이어오고 있다. 장기집권이 지속되면서 러시아가 권위주의로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푸틴의 러시아가 전임 옐친, 더 앞서 옛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구상했던 조국의 미래였을까?
덧붙이는 글 기독교 인터넷 신문 <베리타스>에 동시 송고합니다.

1991 -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마이클 돕스 (지은이), 허승철 (옮긴이),
모던아카이브, 2020


#마이클 돕스 #1991 #KAL 007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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