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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아는 7살의 나이에 첼로를 시작해서 12살에 포르토 시향의 첼로 파트를 이끌었고 17살에 솔로 데뷔했다. 여성 최초로 이름을 떨친 첼로 연주자이며 현재 음반으로 들어볼 수 있는 최초의 여성 연주자이기도 하다. 수지아는 격정적인 연주 스타일로 첼로의 헤라클래스란 닉네임이 따라다녔다.
천재들은 한 세기 안에 머물면 어떻게든 연결이 되나 보다. 수지아는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살스(12세 연상)를 만나 7년 동안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눴으나 끝내 그의 청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지아가 사망하고 훗날 파블로는 수지아 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된 자클린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수지아와 자클린은 보이지 않게 연결된 셈이다.
1912년, 영국으로 온 수지아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1950년 사망했다(수지아가 사망했을 때 자클린은 5살이었다). 수지아는 자신의 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팔아서 국적과 관계없이 일류 연주자가 될 잠재력을 소유한 스물한 살 미만의 연주자에게 수여하라는 유언장을 작성했고, 그로 인해 수지아 상이 만들어졌다.
1956년, 수지아 상 첫 오디션이 왕립음악 아카데미에서 열렸다. 5명의 지원자가 참가했고, 참가자 중 가장 어린 자클린은 겨우 열한 살이었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존 바비롤리는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플리스가 보낸 추천서를 읽어주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자클린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연주자이며, 이를 위해 모든 조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리스의 반주에 재키가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2분도 채 되지 않아 바비롤리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바로 이거야!" 심사위원은 아니었지만, 수지아와 함께 협연했던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엷은 황갈색 머리의 어린 소녀가 우리에게 연주를 들려줬을 뿐 아니라 우리를 아연실색케 했다. 그녀의 키는 첼로만큼도 되지 않았다. 청중들은 짜릿한 전율을 맛보았다." - 자클린 전기 인용.
어린 천재에게 남은 상처
수지아 상의 첫 번째 수상자는 자클린이 되었고, 이로 인해 자클린은 이 재단의 후원으로 수년간 돈 걱정 없이 최고 수준의 첼로를 배우게 된다. 이 수상은 그녀에게 첼리스트로서 급성장하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지만, 이를 계기로 또래 친구들과는 영영 멀어졌다.
어린 자클린에게도 우정과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지만, 또래 아이들에게 자클린은 그저 질투나 찬탄의 대상일 뿐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어린 자클린에게 평생 상처로 남았다. 천재일지라도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다.
1961년, 런던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위그모어 홀에서 자클린의 독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를 위해 그녀의 후원자 홀런드여사는 1673년에 제작한 스트라디바리(당시 시가 3만 5,000파운드)를 선물했다. 550석의 홀은 만원이었고 역사적인 연주가 시작되었다. 헨델의 G장조 소나타를 시작으로 바흐 무반주 첼로, 브람스, 드뷔스 소나타등이 연주되었다.
당시 <타임즈>에 나온 논평에는 '열여섯 살의 놀라운 첼로 천재'라는 제목으로 "자클린 뒤 프레 양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어린 연주자라고 믿기 어려운 기량을 가졌기에 그녀의 공연 논평을 쓰면서 전도유망을 언급한다는 것이 모욕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뒤 프레는 이미 자신의 악기인 첼로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이 연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로 연주자의 서막이 되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참고서적
<자크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캐럴 이스턴/윤미경. 마티)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박종호. 시공사)
<더 클래식 셋>(문학수, 돌베개)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전원경,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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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걱정 없이 연주만... 첼리스트로 급성장했으나 잃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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