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전신영씨가 지지발언을 하고 있다. 길 건너편에는 LA한인타운에 주둔한 주 방위군의 모습이 보인다.
이철호
한인타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참석하지 않고 반대한 사람들도, 1992년의 '사이구'를 말한다. 그런데 그 해석은 사뭇 다르다.
미주 한인에게, 특히 LA에 사는 한인에게 1992년 4월 29일은 절대 잊히지 않는 악몽이다. 교통단속에 걸린 흑인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LA경찰들이 무죄판결을 받던 날, 흑인 커뮤니티는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그 분노가 시작된 4월 29일부터 LA는 폭행과 살인과 약탈과 방화가 난무한 무법천지가 6일 동안 계속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은 물론이고 연방 군대가 투입되고 나서야 이 소요는 멈췄다.
그 기간 동안 63명이 사망했고, 2383명이 다쳤으며, 10억 달러(약 1조2048억 원)가 넘는 재산피해가 생겼다. 한인 사망자도 1명이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고, 전체 재산피해의 반은 한인이 입은 피해였다. 공권력이 보호하지 않은 LA한인타운이 약탈과 방화의 먹잇감이 됐기 때문이다. 약탈이나 방화 피해를 입은 한인상점은 무려 2300여 곳에 달했다.
소수계 이민자인 한인들은 애써 일궈놓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그날의 상흔은 집단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주 한인들은 1992년 4월 29일의 사건을 'LA폭동'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LA폭동(LA Riot)'이라고 부르면 피해자의 입장이 강조되면서, 흑인이 받아온 억압과 이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고 약탈과 방화만 남는다. 그래서 흑인의 입장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LA봉기(LA Uprising)'라고 부른다. 그러나 약탈과 방화로 인해 주저앉은 피해자의 아픔이 가려져버리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으로 '사이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사이구'를 겪으면서 한인 커뮤니티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소수계 이민자 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인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 사건 이후 한인 중심의 시민운동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유권자 수를 늘리고 선출직으로 진출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었다. 다른 하나는 한인 커뮤니티가 다른 커뮤니티와 공생하는 데 소홀했다는 인식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커뮤니티와의 공감대를 넓히고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인식은 깊은 성찰로 이어지지 못했고, 가시화된 성과를 내는 데도 부족함이 있었다. 한인들이 받은 집단 트라우마가 큰 장애였고, 한인들의 배타적인 문화도 영향을 주었다. '사이구'를 겪었지만 흑인운동을 지지한다는 이용식씨는 이렇게 말한다.
"인종차별에 대한 역사를 다시 한 번 고찰하고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한인타운이 뚝 떨어진 섬이 아닌, 같이 사는 커뮤니티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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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뺏기고도 흑인 돕냐" 이 말에 대한 LA 한인들의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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