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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멘 총이 욕심 나 못견뎠다" 무기 구입 길 개척한 독립군

[새로 쓰는 독립군사 7] 3800정의 무기와 독립전쟁의 선포 1

등록 2020.08.04 14:30수정 2020.08.0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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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후 청년들은 항일전사가 되기 위해 집결했다. 옛 의병들도 모였다. 부대도 편제했다. 하지만 무기가 없었다. 무장(武裝)은 모든 독립군단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무기 구입 길의 개척과 김종화

무기를 갖추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 왜적과 전투하며 무기를 빼앗는 것. 홍범도부대는 의병 때부터 일본군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강화했다. 홍범도는 회고(<홍범도의 일지>)에서 일본군에게 빼앗은 총과 탄환 숫자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만큼 무장 탈취를 중요하게 여겼다. 초기 전투에서 200여 명의 일본군을 보고 "그놈들 멘 총을 본즉 과연 욕심이 나서 못 견뎠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실제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에게서 총을 빼앗아 무장한 뒤로 끊임없이 일본군 무기를 빼앗아 무장을 강화해나갔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의용군은 적의 무장을 빼앗아 무장을 강화하기도 하는데 홍범도부대는 전술적으로 그 방법이 체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3.1혁명 후 편제된 독립군단이 무기도 없이 일본군과 싸워 무기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장을 갖추고 국내로 진공한 후에는 전투를 통해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할 수 있지만 비무장 상태로 일본군과 맞서는 것은 희생만 가져올 뿐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둘째, 외국의 군사 지원을 받는 것. 중국, 소련, 미국의 후원을 고려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한계가 있었다. 실제 독립군단이 편제된 중국과 소련의 군사 지원은 가능했다. 하지만 3.1혁명 직후 임시정부의 외교 상황으로는 즉각적인 외국의 후원을 바랄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도 시정 방침을 밝히면서 '군사: 개전 준비' 항목에서 의용군 모집, 군대 편제, 사관학교 설립, 비행대 편성 등을 적시하고 무장 준비에 대해서는 '군물(軍物) 수입 교섭'이란 제목으로 '미국, 노국(러시아), 기타 외국에 교섭하여 군물 수입을 준비함'이라고 하였다('고경제14529호'). 14개 조항 중 11번째였다. 정부 차원의 무장 준비는 당장 실현될 가능성이 적었다.

셋째, 각 독립군단이 직접 무기를 구입하는 방법.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의 대부분은 군인 양성과 무기 구입 등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홍범도는 망명 후 몇 년 동안 노동을 해서 마련한 자금으로 17자루의 무기를 구입했다. 이것이 3.1혁명 후 대한독립군 무장의 기초가 되었다(<홍범도의 일지>). 국민회는 1919년에 8만905원의 자금을 모집했는데 90%에 가까운 7만1595원을 군사비로 사용했다. 군무위원회에 6만5833원, 무관학교에 3750원, 제1사령부(홍범도 정일(征日)제1사령부)에 2012원을 지출했다.(주1) 군무위원회 비용 가운데 군복 등 일반 군수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기 구입에 사용되었다.


여러 독립군단은 자금, 부대편제, 지역 등 상황에 맞추어 무장을 갖추어 나갔다. 만주, 노령 독립군의 회고에는 무기 구입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만큼 3.1혁명 후 무기 구입이 중요했고 그를 위해 각 독립군단이 힘껏 노력했던 것이다.

처음 무기 구입 경로는 주로 중국 동북 지역이었다. 북만주의 의군부는 길림 연길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무기를 많이 갖고 있던 김재규에게 무기 헌납을 요청했는데 그는 의군부를 위해 기꺼이 무기 구입에 나섰다. 남만주 장백현의 군비단은 결성 후 무기가 없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한 국내 진입 작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봉천, 길림에서 무기 구입 길을 개척했지만 수량이 적었다. 일경의 감시 속에서 운반에 따른 희생이 나오기도 했다.(강상진, <군비단>). 길림, 봉천 등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무기 구입은 한계가 컸다. 수량이 적고 가격도 비쌌다. 중국총은 성능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남만주 한족회는 초기에 현지 중국인에게서 중국제 권총과 엽총을 구입했다. 일제 당국은 중국총이 "실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했다('기밀공제25호'). 화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각 독립군단은 화력이 좋은 러시아총, 영미총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만주 독립단은 안동현의 이륭양행(怡隆洋行)을 통해 상해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영국 무역회사인 이륭양행은 독립운동을 많이 지원했다. 대표 조지 쇼가 일경에게 피체되기도 했다. 이륭양행을 통한 무기 구입도 쉽지는 않았다. 일경의 감시 속에서 무기 운반이 위험했다. 또 상해에서 선편으로 장거리 운송해야 하므로 가격이 비쌌다.

가격, 수량, 화력, 구입 경로의 위험성 등 때문에 만주나 상해에서의 무기 구입은 급속히 편제되고 있는 각 독립군단의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다. 새로운 무기 구입 경로가 필요했다. 이 때 유력하게 부각된 것이 노령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던 10만 명의 체코군은 무기를 팔아넘기고 있었다. 때로 버리고 갔다. 독립군이 갈망하던 무기를 마음만 먹으면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버리고 갈 정도니 가격도 쌌다. 일본돈 15원으로 모신나강 5연발 소총을 살 수 있었다(최계립, <간도 15만원 사건>).

또 소비에트 적군과 러시아 백군의 내전에서도 무기가 흘러나왔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했는데 백군은 전투에서 지면 총을 팔고 도망쳤다. 따라서 일본군이 사용하던 38식 소총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00발의 탄환을 포함해서 1정에 일본돈 15원으로 구입했다(김홍일, <대륙의 분노>).
  
 

19세기 말 러시아가 개발한 소총 모신나강 1차세계대전 때 많이 사용했고 1920년 독립군이 노령에서 구입해서 만주로 반입했다. ⓒ 나무위키

 
전쟁이 있는 곳에, 전투에서 지고 도망치는 군대에 독립군이 필요한 무기가 있었다. 노령에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노력은 1919년부터 있었다. 서로군정서는 노령에서 무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하고 9월에 교관 김경천을 파견했다. 또 철혈광복단도 3.1혁명 후 무장운동의 방침을 토론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싸게 구입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15만원 탈취 사건' 전, 곧 1920년 1월 전의 논의였다. 하지만 1919년에 노령의 무기 구입 길은 열리지 않았다.

1920년 봄부터 노령에서 무기 구입이 시작되었다. 군비단 간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러시아 백군의 무기를 구입해서 배를 이용해 운반했다(<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신민단은 1920년 4월 1일부터 포시예트 항구에서 체코군이 버린 무기를 수습해서 만주로 옮겼다. 이후 자금을 마련해서 많이 구입해서 무장을 강화했다(김병하, 「치머우 조선빨치산대>). 노령에서의 무기 구입이 알려지면서 각 독립군단은 만주와 상해에서의 구입을 중단하고 노령으로 인원을 파견했다. 국민회는 1919년 여름까지도 만주 영고탑(寧古塔)의 상인을 통해 무기를 구입했지만 1920년 7월에는 노령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노령의 무기 구입을 주선한 중심인물은 김종화(金鍾和)였다. 그는 혈성단 소속이었지만 혈성단만 아니라 광복단, 신민단, 의군단 등의 무기 구입도 주선했다. 그는 1920년 초 주홍익과 함께 장총 40정, 권총 다수를 구입했다. 이것으로 1920년 3월(음력) 니콜리스크에서 조직된 혈성단이 무장을 갖추었다.(주2) 김종화를 통해 이 때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 무기 구입의 길이 개척되었다.

만주 독립군단은 김종화를 통한 무기 구입 소식을 듣고 군자금을 보냈다. 김종화는 그 군자금으로 광복단(음력 4월)과 신민단(음력 6월)의 무기를 구입해 만주로 보냈다. 10월에는 의군단(의군부)의 무기 구입도 주관했는데 일본군에게 탐지되어 성공하지는 못했다. 만주 독립군이 노령에서 무기를 구입할 때는 으레 김종화가 일을 주관했다. 무기 구입을 위해 파견된 의군단 박봉래도 김종화의 지휘를 받으라는 의군단 본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판결 대정 10년 형공 제239호'). 국민회도 무기 구입을 위해 박호일을 파견했다. 북로군정서는 총재 서일(徐一)이 직접 노령에 가서 무기 구입 계약을 성사시켰다. 1920년 7월이다.

노령에서의 무기 구입을 통해 만주 독립군단이 연이어 무장을 갖추면서 일제는 경계를 강화했다. 이후 노령에서 무기 구입은 점차 어렵게 되어갔다. 10월에 의군단의 무기 구입 계획은 일본군에게 탐지되었다. 의군단 파견원과 통역 등이 피체되면서 실패했다. 이 때 구입하려던 무기는 대규모였다. 체포된 통역은 러시아인에게서 소총 2000정, 탄환 20만 발을 구입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체포된 김종화의 판결문은 5000여 정으로 기록했다('판결 대정 10년 형공 제239호'). 김종화는 처음 협의된 2000정 외에 계속 무기를 구입해서 만주로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1개 사단을 무장시킬 정도였다. 의군단을 통해 구입이 진행되었지만 규모로 보아 의군단만 무장시킬 목적이 아니었다.

만주에서 각 독립군단이 항일전쟁의 대의를 위해 통합을 논의하던 상황과 연관해 보면, 또 김종화가 자신이 속한 혈성단만 아니라 광복단과 신민단의 무기도 구입해 주었던 사실을 보면, 이 때 대규모 무기 구입을 위한 노력은 독립전쟁을 선포할 만주·노령 독립군의 통일된 대부대 편제까지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 대규모 무기 구입까지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독립군의 무기 구입에서 김종화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승전의 이면에는 김종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일제문서 기밀38호 일제 당국이 노령에서 무기 구입 길을 개척한 김종화를 체포해서 취조한 내용을 적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온힘을 쏟은 무기 구입

무기 구입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독립군단은 북로군정서였다. 다른 독립군단이 구입 인원을 파견한 것과 달리, 북로군정서는 총재 서일이 재무부장 계화, 간부 조성환과 함께 직접 노령에 갔다. 무기 구입에 온힘을 쏟은 것이다.

현지에서 무기 구입은 김영학과 최우익이 주선했다('고경제24867호'). 김영학은 광복단 출신으로 신민단 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의군단 등이 연합을 논의할 때 총기구입위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최우익은 의군단 총무였다.

북로군정서의 무기 구입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상황을 이정(李楨)의 <일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20년 7월 9일에 무기운반대 2개 소대가 노령에서 무기를 운반해 왔다. 7월 23일 500명의 운반대를 또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26일 이교성 중대, 29일 이인백 중대, 이호룡 중대, 30일 이근식 중대, 8월 4일 운반 총지휘 최완이 차례로 출발했다. 이근식 중대는 필요 없다는 판단으로 운반대에 포함되지 않고 8월 10일 귀환했다. 그리고 9월 7일 총재와 간부, 무기운반대 3개 중대가 북로군정서 군영에 도착했다.(주3)

이정의 기록에 두 차례 구입 과정이 적혀 있다. '일지'가 시작되는 7월 전에도 무기 구입이 있었다. 1920년 6월 말 일제 문서(<기밀공신제163호>)에 따르면, 북로군정서에 소총 600정과 수류탄 60개가 있었다. 노령에서 무기 구입이 시작된 1920년 봄부터 6월 사이에 운반한 무기였다.

그러면 마지막인 9월에 반입한 무기 수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교성 중대가 103명이었으니까 3개 중대 전체로 보면 300명 안팎이다. 경비대에 있다가 운반대 1중대로 운반에 참가했던 이우석은 230명(운반대 200명, 경비대 30명)이 '힘껏 한 짐씩 지고 200여 정과 중기관총 및 탄약'을 운반했다고 회고했다.(주4) 1인 1정 정도이다. 하지만 전투부대가 아닌 운반대임을 감안하면 1인당 적어도 2정(탄약 포함)은 운반할 수 있다.

무기 구입을 분석한 일제 문서('고경 제24867호')는 '한 사람에게 2정 내지 3정을 부담케 하고 적당히 탄약을 분담'하여 행진했다고 하였다. 600-900정 정도를 운반한 셈이다. 이근식 중대가 중도 귀환한 점을 고려하면 3개 중대 전체가 무기를 운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우석이 운반대를 230명 정도로 회고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2정 정도를 운반할 수 있다고 보면 적어도 460정 정도는 운반이 가능하다. 여기에 7월에 2개 소대가 운반한 무기를 합하면 600정 정도가 된다.

일제 정보에 따르면 1920년 8월 현재 북로군정서의 무장은 다음과 같았다.(주5)

군총(軍銃)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기관총 7정. 박격포 2문, 수류탄 780발.

이렇게 해서 북로군정서는 독립군단 가운데 가장 강한 무장을 갖추었다.
 

북로군정서 무기 현황 북간도지역 독립군단 명부(일어 원문제목-간도지역에서의 불령선인단의 조직 및 역원 조사표)에 소총 1200정 등 당시 가장 강한 무장 보유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 국가보훈처




홍범도부대(대한독립군)은 3.1혁명 후 17정의 무기로 무장을 시작했다. 홍범도가 망명지에서 노동한 비용으로 구입해 감추어두었던 총이다. 이어 노령 신한촌의 조자원, 정상현 등이 체코 군대가 버리고 간 폭탄을 모아서 홍범도부대에 전달했다. 만주로 들어와서는 마적과 전투해서 총 50정과 탄환 1300발을 빼앗았다(<홍범도의 일지>). 홍범도부대는 대량 무기 구입보다 탈취나 후원이 많았다.

홍범도부대는 행정조직을 통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무기 구입을 추진할 상황이 아니었다. 일제 문서(<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에 따르면 1920년 8월 현재 대한독립군의 무장은 군총 200정, 탄약 4만발, 권총 30정이다. 하지만 대한독립군의 무장을 과소평가했다. 체코군이 사용하던 폭탄도 가지고 있었다. 또 청산리전투에서 '뿔니묘트를 걸고 일본군 대부대에다 내둘렀던' 사실(<홍범도의 일지>)로 보면 기관총도 보유하고 있었다.

국민회는 러시아에서 무기 구입 길을 열리자 전복신 등의 운반대 20명이 노령으로 가서 소총 15정과 탄약 2000발을 왕청현 대감자(大坎子)로 운반해 왔다. 1920년 4월(음력)이다. 구입 경로를 타진하는 단계여서 많이 구하지는 못했다. 이후 중앙 총부(總部)의 노력으로 7월에 소총 300정(정당 탄환 1200발)을 1만5000원에 구입하기로 계약(정당 50원)했다. 제1중부도 노령에 박호일을 파견했다. 그 결과 장총 100정(정당 탄환 100발)을 3500원에 구입했다('국민발 제168호' '1중발 제 261호'). 일제가 파악(<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한 1920년 8월 중순 국민회의 무장은 군총 600정, 탄약 7000발, 권총 160정, 수류탄 120개였다.

광복단은 1920년 4월(음력)에 무기 구입 자금을 김종화에게 보내서 무기를 구입하려 했다. 김종화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체코 장교를 통해 군총 1000정을 9000원에 계약했다. 하지만 전체 수량이 만주로 반입되지는 않았다. 일제 정보(<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에 따르면 1920년 8월 현재 광복단의 무장은 군총 400정, 탄약 1만1000발, 권총 30정이었다.

군무부(훈춘한민회군)은 1920년 5월에 이미 기관총 13정, 소총 510정(미국식 132정, 러시아식 351정, 38식·30식 엽총 48정), 탄환 10만0500발, 폭탄 55개, 권총 130정을 보유했다는 일제 정보 기록('기밀공신제59호')이 있다. 하지만 기관총 13정, 미국식 소총 132정을 보유할 구입 경로가 5월 전에 없었으므로 과장이다. 실제 무장은 5월 정보보다 적었다. 1920년 8월 현재 무장은 군총 300정, 기관총 3정이었다(<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

군무도독부는 노령에서 여러 차례 무기를 구입했다. 1920년 6월 소총 50정, 탄약 1200발, 기관총 1정이 훈춘에 도착해서 부장(府長) 최진동과 부하 29명이 근거지로 운반했다('기밀공신제68호'). 이후에도 무기를 반입해서 1920년 8월 현재 군총 200정, 탄약 1만2000발, 수류탄 120개, 기관총 2정을 보유하고 있었다(<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

신민단은 1920년 초에 '무장 밀매 및 운반대'를 조직했다. 4월에 김려하를 책임자로 10여 명이 '무장 수탈'에 나서서 노령 포시예트에서 30여 정을 모았다. 이를 김병하가 만주로 옮겼다. 신민단의 첫 무장이었다(김병하, <치머우 조선 빨치산대>). 김려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6월(음력) 김종화를 통해 체코군이 사용하던 소총 100정, 탄환 십만 발을 구입했다. 이로써 만주의 무장이 강화되었다. 일제 문서에 따르면 1920년 8월 현재 신민단 무장은 군총 160정, 탄환 9600발, 권총 30정, 수류탄 48개였다(<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 신민단은 노령과 만주 두 곳을 근거지로 했지만 무기 이동 경로를 보면 위 무장은 대체로 만주 부대가 지닌 것이다.

의군부는 처음에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싸창'(모젤 권총)과 장총을 지녔던 김재규에게 기증을 부탁했고, 얘기를 들은 그는 적극적으로 무기 구입에 나섰다. 중국인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장총 100여 정(정당 탄환 500발), 단총 7정을 구입해서 의군부의 첫 무장을 갖추었다(김재규, <의군부>).

러시아에서 무기 구입 길이 열린 뒤에는 최병직, 박봉래, 한병국 등에게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무기를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1920년 7월(음력)에 소총 10정, 탄환 1267발과 배낭 등의 군수품을 구입해 양자구(揚子溝)로 보냈다. 8월(음력)에는 노령에서 무기 구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김종화와 함께 3700원으로 많은 무기를 구입하려 했다. 10월 8일에 소총 125정, 탄환 1만2500발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운반용 기선을 대기시켜놓고 무기 운반을 준비하던 중 일제 헌병에게 발각되어 최병직, 박봉래 등이 피체되면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결국 의군부는 만주에서 구입한 100여 정의 소총으로 일본군의 만주 침공을 맞았다.

군비단은 1920년 봄에 단장 김찬(金燦)이 김덕은(재무담당), 박춘근, 엄관호와 함께 무기 구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이승을 만나 무기 구입을 의논하고 러시아 백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사들였다. 권총 1정 60원에 28정, 폭탄 1개 40원에 60개, 망원경 1개 40원에 10개를 우선 구입하고 동포의 목선에 싣고 해안으로 운반했다. 그곳에서 무기 운반대가 인수해서 국경 훈춘 지대를 경유해서 왕청으로 반입했다. 또 1정 14-25원에 장총 40정을 구입해서 역시 목선으로 멍고개까지 운반하고 그곳에서 운반대가 인수해서 만주로 들여왔다(<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주)
주1)<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341-342쪽. 무관학교 비용이 적은 것은 설립 준비 단계였기 때문이다.
주2)위의 책, 1186쪽.
주3)장지연 외, 김영호 옮김, <항일운동가의 일기>, 서문당, 1986.
주4)박영석, <한 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 박영사, 1984, 73쪽.
주5)신용하,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227-228쪽; <<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 국가보훈처, 1997, 20쪽.

 
덧붙이는 글 '새로 쓰는 독립군사'는 주중에 연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독립군의 무기 - 3800정의 무기, 독립전쟁의 선포 2'입니다.
#독립군의 무기 #김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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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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