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무서워 울어버린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나도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손전등 대신 따뜻한 손을 건낼 수 있다면

등록 2020.08.21 11:27수정 2020.08.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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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다 졌었네... 방에 가서 옷 갈아입어요~"


우유를 마시다 옷에 한껏 기부해버린 둘째에게 아내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엄마, 연주 울어요~"
"아빠, 누나 울어요~"
"울어! 울어!"


보고 체계가 잘 갖춰진 우리 집. 속보가 빗발쳤다. 1, 3, 4호기의 보고를 받고 달려가 보니 2호기가 멀뚱히 서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입도 달싹거리지 않는 아이. 불안한 눈으로 그저 눈물만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스무고개를 넘어야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열리지 않을 입을 알기에 하나씩 짚어 나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언의 대답을 캐치하는 것인데, 미묘하게 달라지는 눈빛과 미세한 고갯짓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 아파?" (절.... 레...). 아니란다.
"슬픈 일 있었어?" (절...... 레). 이것도 아니란다.
"무서운 거 있었어?" (절...). 뭔가 비슷한가 보다.
"무서워?" 눈빛이 흔들리며 고개가 미세하게 아래로 향한다.



아... 어렵다. 그렇게 시작된 스무고개는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불 꺼진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다는 것으로 확인이 됐다. 옷은 갈아입어야 하는데 불을 켤 용기조차 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는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나 보다. 숨바꼭질할 때는 잘도 숨더니... 참 알다가도 모를 7세 아이의 마음이다.
 
어둠 속에서 맞잡은 손 어둠 속에서 필요한 건, 손전등 보단 손

어둠 속에서 맞잡은 손 어둠 속에서 필요한 건, 손전등 보단 손 ⓒ 남희한

아이가 절실했던 것은 불빛이 아니었다

아무튼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옷장으로 향했다. 내가 잡은 손이 못 미더웠는지 다른 손으로 내 검지를 재차 잡는다. 아이가 무서워하니 뜻하지 않게 나도 긴장 상태 진입. 뭔가 익숙한 느낌에 문득, 어릴 적 내가 떠올랐다.


'그랬지. 어두우면 덮어 놓고 무서웠지....'

당시엔 단칸방에 살았으니 집안에서 무서울 일은 없었지만 밖에 있는 화장실이라도 가야 할 땐, 조금 전 다투었던 누나에게라도 도움의 손길을 뻗어야만 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절실했던 동생과 단단히 삐쳤지만 다음을 위해 손을 잡아 주었던 누나. 달빛이 어스름히 내려앉은, 화장실 가는 길은 그렇게나 무서웠다.

아빠가 귀신보다 세다고 믿는 것인지 특별히 해주는 것도 없는데 아이는 눈물을 거두고 발을 움직였다. 그저 잡은 손만으로도 용기가 생기나 보다. 덕분에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만족감에 젖어 있는 사이,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로 스위치를 찾아 방에 불을 밝혔다.

"그대로 있어욧!"

불은 켰지만 여전히 무서운 아이의 명령이 돌아 나가려는 아빠의 등을 두드렸다. 후딱 아무거나 집거나 옷을 찾아 달라고 할 법도 한데, 또 나름 원하는 패션이 있어선 무서움 속에서도 대충이 없다. 패션을 아는 나이 일곱 살. 분주히 움직이며 중간중간 아빠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저 아이를 나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리저리 뒤적이던 아이의 눈빛이 초롱해지며 흡족한 표정으로 옷을 꺼냈다. 엘사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원피스. 아이의 얼굴에서도 엘사의 표정이 엿보였다. 그 순간, 목적을 이룬 아이의 만족스러운 표정에서 뭔가 이야기의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1. 엘사 옷이 입고 싶다.
2. 묻으면 말려 입을 수 없는 우유를 주문한다.
3. 슬쩍 쏟는다.
4. 엘사 옷을 꺼내 입는다.


와중에 예상치 못한 불 꺼진 방이라는 복병을 만나 많이 많이 속상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아마... 여기까진 나의 소설. (웃음)

이유야 어떻든 행복해하는 아이의 표정에 나도 행복했다. 옆에 있어 준 것뿐인데 엄지를 날려주고 고맙다고 안아주는 아이. 멋진 왕자라도 앞에 둔 양 부끄러워하며 고맙다고 하는 딸아이가 예쁘기만 하다. 말 한마디와 웃음 한 번에 눈가는 자글 해지고 입은 그냥 벌어진다.

어두운 곳에서 필요한 건

아직 부족하고 두려운 게 많은 나라서 많이도 아등바등했는데, 돌이켜 보면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어두운 방을 함께 가주고, 떨어진 휴지를 가져다주고, 간을 봐달라는 요청에 둔한 혀를 놀리는 것만으로도 곳곳에 안도와 편안함을 채우고 있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사람인지, '함께'라는 것에 적지 않은 위안과 용기를 주고받는다. 툴툴거리며 화장실을 함께 가주었던 누나도, 혼자 있던 정류장에 멀찌감치 앉아 있던 이름 모를 행인도, 특별히 하는 것이 없음에도 마음 한켠에 안도감이라는 따뜻한 빛을 쬐어 주었다. 사람의 온기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보다. 그 차가운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는 따뜻함이라니. 여기서 숟가락을 살짝 얹어 보면,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 자못 보람을 느낀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막연한 두려움을 마주한다. 나라고 예외일 수 없고 너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 어두운 통로를 지나는 동안 필요한 것은 고급스럽고 밝은 손전등이 아니라, 맞잡을 수 있는 누군가의 손이고 두려움에 함께 흔들릴 눈이며 가느다랗게 들리는 숨소리일 테다. 함께 있다는 위안. 그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다짐한다. 손 내미는 이에게 차가운 손전등 대신 따뜻한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지. 가진 것이 없어 줄 것이 없다며 고개 숙이지 않고 손을 맞잡고 얼굴을 살펴야지. 그리고 어두운 통로의 끝에서 누구보다 격하게 환호해 줘야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최고는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니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그림에세이 #용기 #진정한위안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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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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