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생활 거의 1월 한 달을 천안단대병원과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생활했다.
지요하
자그마치 19만 7천원을 들여 사설 응급차량을 타고 천안 단국대학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내가 코로나 방역 망에 정통으로 걸려들었음을 감지했다. 이미 코로나 방역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나는 허리통증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생각했다. 밤에 굳이 화장실을 가다가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은 것과 아침에 또 한 번 무의식중에 넘어진 것 때문에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실수만 없었으면, 또 가족들이 깜짝 놀라 119만 부르지 않았으면 비용 들이며 이런 생고생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기도 했다.
집 안 거실의 내 전용 컴퓨터 안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일거리 생각 때문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컴퓨터 안에서 어느 정도 꼴이 갖춰지고 있는 그 일거리는 어쩌면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평생의 마지막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한 일이었다.
나는 현재 3월 1일 출간을 목표로 '촛불시집'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촛불혁명'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만든 나라이고 민족인데, 그 촛불을 기념하는 시들을 모은 시집이 없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기백명 시인들의 시들을 한 편씩 모아서 만든 촛불혁명 찬양시집은 존재하지만 한 개인의 촛불 관련 시들을 모은 시집이 없다는 것은, 나로서는 역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 부끄러운 일을 감히 내가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촛불시집' 출간 준비 소식을 우리 고장신문에 맨 먼저 알리다
처음엔 그저 네 번째 '목적시집'을 출간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2008년의 첫 번째 목적시집인 신앙시집 <때로는 내가 하느님 같다>와 2012년의 두 번째 목적시집 <불씨>, 2013년의 세 번째 목적시집 <그리운 천수만> 이후에 이어지는 목적시들을 모아서 네 번째 목적시집이라는 말을 표방하려 했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내 많은 시들에서 강하고 명료하게 '촛불'이 불타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촛불혁명 당시 전국 각지의 성당들과 안산시 야외음악당,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대전 현충원 현충각., 경기도 안성시 유무상통마을 등등에서 낭송했던 시들이 여러 편이었다. 또 동학혁명과 안중근 장군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행사 낭송시들에서도 촛불이 불타고 있음을 느꼈다.
출판사와 평론가의 의견도 있어서 결국 네 번째 목적시집이라는 말 대신 '촛불시집'이라는 표어를 달기로 했다. '촛불의 생명력과 영속성을 위하여'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이 시점, 또 이 지점에서도 나를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 퇴원 후 허리 통증이 많이 완화되더니 이제는 제법 걸을 수 있게 되고, 코가래 발작도 많이 줄어서 성당 주일미사에도 갈 수 있게 됐다.
단국대학병원에서 퇴원한 열흘 후 중앙보훈병원으로 옮겨 보름가량 입원해 있었는데, 그때는 오른쪽 허벅지 통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마저 갈 수 없어 노상 기저귀를 차고 살면서 하루는 휠체어를 타고 신경외과로 가서 다시 CT를 찍었다 역시 척추협착증이 심한 상태라는 진단과 함께 복막투석 환자라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는 참 절망적이었고 비참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단국대학병원에서 신장 관리를 하면서 집중적으로 폐렴 치료를 한데 이어 보훈병원에서도 계속 폐렴약과 신장약을 함께 처방했고 점차 폐렴균이 졸아들었다. 그러자 허리 통증 완하와 함께 걸을 수 있게 되고 퇴원도 할 수 있게 됐다.
1월 3일 밤 방을 나와 화장실을 가다가 엉덩방아를 찧곤 한 것도 폐렴균의 장난이었음을 그때는 생각도 못했다. 두 병원에서 퇴원 후 나는 입원과 관련하여 추호도 가족들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내 앞에는 늘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길잡이를 해주신다는 것을 느낀다. 병원에서 나와 내 네 번째 목적시집인 '촛불시집' 출간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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