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자 황인태
박만순
"인태야! 니 집 밖에 나갈 생각 말어." "엄니, 내일 시험 보는 날이라 오늘 목포 가야쓰는디." "이 놈의 자식이 죽을라고 환장했나. 배고 버스고 모두 끊긴 것 모른다냐."
전남 완도군 신지면 월부리 황인태(1932년생)가 1946년 목포 문태중학교(당시 4년제)에 입학시험을 치러 가려다 어머니와 나눈 대화다. 완도군 신지면 신지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목포로 유학을 준비했으나 1946년 창궐한 콜레라로 좌절되었다.
이 콜레라는 1946년 5월부터 시작해 7개월 사이 15,644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 중 10,181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11월에 종식되었다. 8.15 해방 후 귀환과 함께 중국의 화중 및 화남 방면으로부터 남한의 항구, 특히 부산에 콜레라가 상륙해 1946년 남한 일대에 크게 유행했다. 당시 각 도시에서는 방역선전, 예방주사, 교통차단 등을 실시했다.(박인순, 「美軍政期의 韓國保健醫療行政에 관한 硏究」)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경북이 3,980명으로 가장 피해가 컸고 전북은 1,591명, 전남은 818명이었다. 완도군 신지면에서는 면사무소가 폐쇄되고, 완도, 광주, 목포로 가는 배가 모두 끊겼다.
황인태는 당시 신지면에서 콜레라로 죽은 이들을 명사십리 해수욕장(현재 명사십리 제2주차장)에서 화장했다고 기억한다. 이 일로 황인태는 목포 유학의 꿈을 접고 완도중학교에 진학한다. 그로부터 4년 후 그에게는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일어난다.
화학산에서 총 맞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이 수복한다는 소식에 완도군 신지면 월부리 청년들은 피난 짐을 쌌다. 황인태는 1950년 9월 말 마을 청년 4명과 월부리 선착장에서 조각배를 타고 해남 남창으로 갔다. 거기서 강진, 성전을 거쳐 풀티재를 넘은 후 유치산으로 가려다 전남 화순군 화학산으로 선회했다.
화학산에서 그는 '인민유격대' 빨치산이 아니라 살기 위해 도망 다녀야 했다. 그러다 토벌대의 총에 대퇴부를 맞은 황인태는 죽기 살기로 뛰어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났다. 화학산과 장흥군 유치면에 있던 가지산으로 피난을 간 마을 선배들은 대부분 토벌대의 총에 생을 달리했다.
상처를 치유한 황인태는 지리산으로 갔고 거기서 몇 개월을 지내다 203전투부대에 체포되었다. 산으로 올라간 지 1년 만이던 1951년 9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순천에 주둔하던 203전투부대 기지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당시에는 산에서 잡히면 현장에서 즉결처형되거나 포로수용소에 구금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가 풀려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203전투부대 부대장과 황인태의 외삼촌이 일본 명치대 동창이었던 것이다. 황인태 외삼촌은 부대장에게 "내 체면을 봐서 살려줘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여버려라"라고 말했다.
황인태는 풀려난 후에도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는 전남 강진군 도암지서에서 의경으로 6개월 근무했다. 이로써 황인태는 '빨치산(?)'에서 '경찰'이 되었다. 일종의 신분 세탁이었다.
구순의 증언자들
6.25때 남편과 오빠와 남동생을 국가로부터 학살당한 이남금과 피난 갔다가 대퇴부에 총 맞은 황인태는 이제 구순의 나이다. 이남금은 집나이로 100세다.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특히 가족 세 명을 잃은 이남금은 더더욱 그렇다. 그녀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맞아 가족의 억울한 죽음이 70여 년 만에 밝혀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남금은 100세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하다. 특히 기억력이 좋다. 그녀의 기억력이 이토록 온전한 것이 시대의 증언자로 역할을 하라는 신의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기억하는 자만이 역사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이남금과 황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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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할머니가 또렷이 기억하는 남편이 죽은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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