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브로너스 공식 웹사이트에 소개된 6가지 원칙 가운데 하나, '옳은 일을 위해 기부하고 투쟁하라.'
닥터브로너스
'행동주의 기업'을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책에 담긴 특징들을 모아 보면, 비즈니스 영역 전반에서 비즈니스를 플랫폼으로 삼아 이해관계자와 함께 기업이 추구하는 미션을 구현하고자 민감한 사회 문제, 심지어는 단기적으로 손해를 볼 수 있는 의제라도 자신(기업)의 역할에 한계를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섬으로써 사회 변화를 만들어가는 기업이다.
닥터브로너스(DR.BRONNER'S)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닥터브로너스는 천연 비누를 비롯한 유기농 바디 케어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다. 석유화학 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천연 소재를 찾다 헴프라는 훌륭한 소재를 찾아냈다. 살충제나 제초제를 거의 쓰지 않아도 되고, 다년생 작물이라 토양 유실도 적은 데다 성장 속도도 빠르다.
여러 모로 지구 환경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좋은 작물이지만 안타깝게도 대마의 일종이라 미국에선 재배할 수 없었다. 중국이나 캐나다에서 수입하면 되지만 이동거리가 길어지는 만큼 지구 환경엔 해로울 수밖에 없다. 다른 기업이라면 그렇게라도 헴프를 쓰는 걸 자랑했겠지만 닥터브로너스는 달랐다. 미국에서 헴프를 재배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관련 단체를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데이비드 브로너 (당시) 대표는 2009년과 2012년 워싱턴 D.C.의 마약단속국과 백악관 앞에서 헴프 재배 합법화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당한다. 백악관 앞에서는 강철로 된 우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헴프에서 직접 기름을 뽑아내는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경찰이 전기톱으로 문을 여는 데 3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닥터브로너스의 이러한 노력 끝에 주정부들이 하나둘 헴프 재배를 허용하기 시작했고, 2013년 10월 미국에선 처음으로 헴프를 수확할 수 있게 된 데 이어 2018년 12월 마침내 미 연방 차원에서 헴프 재배가 합법화되었다. 닥터브로너스가 헴프 오일을 쓰기 시작한 지 20년 만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닥터브로너스는 곧바로 새로운 목표를 내세웠는데, 헴프 산업을 유기농으로 전환할 것과 헴프 재배 농가의 공정 거래를 도울 것 등의 두 가지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공급자, 독립 소농 등과 협력해 유기농 헴프를 생산하는 '브라더 데이비스'라는 소셜벤처를 세워 소규모 헴프 농가의 지속가능성을 돕고 '되살림 유기농업'을 활성하도록 했다(되살림 유기농업이란 기후 변화를 줄이는 것을 넘어 기후를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는 흐름을 가리킨다).
또 '썬+어스 인증(Sun+Earth Certification)'을 만들어 우직하게 가치를 지켜가는 소농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닥터브로너스와 같은 행동주의 기업이 다른 기업에 견줘 어떻게 다른지를 책에선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닥터브로너스는 자신의 비즈니스에 변화를 만든 후, 이에 그치지 않고 해당 이슈와 관련된 산업의 경영환경 변화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환경적 가치를 만들고자 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비즈니스를 사회적 가치 창출의 플랫폼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31쪽)
닥터브로너스는 농민과 지구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제품 생산, 공급망 구축, CEO 참여, 이익 활용 등 비즈니스 주요 요소를 사회적 가치 창출의 지렛대로 활용했다. 이로써 사회 변화를 꾀했으며, 나아가 변화의 크기와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가려 했다.(31쪽)
우리가 진정으로 하려는 것은 사업을 행동주의 엔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데이비드 브로너 총괄대표, 31쪽)
CSR, CSV, ESG... 유행처럼 뜨고 지는 개념들
CSR, CSV, 지속가능경영, 사회적 가치, 그리고 여기에 더해 최근엔 ESG까지 여러 개념들이 마치 유행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길 되풀이하고 있다. 서 팀장은 이 여러 개념들이 저마다 다양한 뿌리를 가지고 등장했지만 대부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고, 또 저마다 나름대로 특화된 장점도 있다고 말한다.
"CSR은 기업의 탄생과 함께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기업이 이해관계자와 같이 생존해야 하니까요. 가령, 장시간 노동과 아동 노동이 난무했던 19세기엔 노동자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CSR이었겠죠. 지속가능경영은 UN 환경회의를 계기로 등장했고, 사회적 가치는 기업이 만들어내는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의 실제 성과가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는 관점에서 시작했죠. 최근 주목받는 ESG는 투자자 관점에서 그 기업이 정말 건강한 기업인지를 어떻게 판단하고 비교 평가할지 하는 요구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는 무엇보다 새로운 개념이 등장할 때마다 다른(과거) 개념을 부정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가령, CSV(Creating Shared Value, 공유가치창출)가 등장하면서 CSR을 이제 버려도 되는 낡은 개념으로 몰고 가려던 움직임이 있었다.
"CSR도 여러 비판을 거치면서 외형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왔는데, 마치 과거 개념으로 규정하고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또 CSV도 CSR이 하지 못했던, 어떻게 비즈니스와 협력해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지, 다시 말해 어떻게 사회적 측면에서 비즈니스 근육을 키울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