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여중 교정 본관과 후관 사이, 고려시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순화리 삼층석탑'이 있다.
최육상
순창여중은 내 삶에 또 한 가지 큰 변화를 끼칠 예정이다. 순창여중을 취재하며 인사를 나눴던 최순삼 교장이 지난 2일 오후 <열린순창>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순창여중 학생 자율동아리를 만들어 언론 관련 교육을 하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는 지역사회와 지역신문, 비판적 시민의식이 담긴 언론, 기사 쓰기를 교육하고, 민주주의에 헌신한 순창인물 탐방 등을 함께 하는 선생님이 될 운명에 처했다.
지난 3일에는, 순창군 ◯◯마을 이장 기사 관련해서 KBS <인생극장> 취재담당 작가가 내게 <오마이뉴스>로 쪽지를 보내왔다. ◯◯마을 이장을 인생극장에서 다뤄보고 싶으니 연락처를 알려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장의 동의를 얻은 후에 작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하이고~메' 사투리가 입에 배었다
순창은 내게 언제 들어도 반가운, 부모님 고향이다. 부모님은 결혼하시며 서울살이를 시작하셨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어렸을 적, 순창에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계셨다. 친가와 외가 모두 순창읍이었다. 친할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가물거린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안 계셔서 사진으로만 기억한다. 형제자매가 많은 아버지(십 남매 장남·작고)와 어머니(칠 남매 장녀·79) 덕분에 내게는 친삼촌, 외삼촌, 고모, 이모, 사촌 형·누나·동생 등이 많았다.
순창은 방학과 명절이면 자연스레 찾는 시골집이었다. 초·중·고 학창시절 방학 대부분을 순창에서 보냈다. 서울에 살면서 1년에 꼬박 두세 달은 순창에서 지냈다. 순창은 부모님 고향이면서, 어린 날 따스한 추억이 몽글몽글 맺힌 시골집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가면 친구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못 본 사이에 내가 변했단다. 말투 때문이었다. '하이고~메(놀라움의 감탄사)', '아따~ 거시기 허네(거시기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 등 서울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순창 사투리가 입에 배어 있었다.
따스한 추억이 맺힌 순창읍에서 이제 석 달가량 살았다. 순창 주민들은 한결같게 인심 좋고, 급할 것 없이 여유롭고, 모든 일을 말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막연하게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약자를 대변할 수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직업관'이 마음에 들었다. 불의와 부조리를 파헤치는 '기자상'이 좋았다. 순창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분명하다. 어릴 적 접했던 '정론직필'과 '사명감'이라는 언론의 직업관과 기자상이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누군가를 비판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게 쉽지는 않다. <열린순창> 같은 조그만 지역신문에서 일하며 밥벌이를 하는 건 만만치 않다. 유튜브 등 언론 환경의 급격한 변화도 크지만, 언론 스스로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조롱을 받으며 신뢰를 추락시킨 점이 뼈아프다. '왜곡'과 '받아쓰기'를 일삼는 언론의 폐해는 지역신문도 비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열린순창>에서 기자 근무를 시작했을 때 가슴을 열고 군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기사를 쓸 때 군민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담겠다고 약속했다.
<오마이뉴스>, 제2의 삶이 내게 준 덤
<오마이뉴스>는 <열린순창> 기자가 되기 훨씬 이전 시민기자로 연을 맺었다. 순창군민이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야기를 <열린순창>과 <오마이뉴스>에 함께 보도할 수 있는 건, 제2의 삶이 내게 준 덤이다. 부모님 고향 순창에서 정말 잘 살아보라는.
전북 순창군 '1개 읍·10개 면, 131개 법정리, 311개 행정마을'을 가슴에 온전히 품을 때까지 마을 구석구석 군민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
"이제 3개월 차 신출내기 군민인 저는 순창여중 기사를 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순창군 주간신문 <열린순창>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