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전 의원의 묘소. 다른 곳과는 달리 봉분 대신 덮개돌을 얹었다. 놓여있는 꽃이 시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서부원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문안 인사하듯 묘역 전체를 둘러보게 된다. 나 역시 당장은 노회찬 전 의원과 백기완 선생의 묘소에 술 한 잔 따라드리고 싶어 왔지만, 두 분만 뵙고 발길을 돌릴 순 없다. 내게 절할 시간에 옆에 누운 동지의 삶에 귀 기울이라고 등 떠미는 것만 같아서다.
언뜻 묘역이 무질서하게 보여도 추모를 위해 닦아놓은 동선은 있다. 묘역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 곳곳에 틈이 있어 어디로든 들어갈 순 있지만, 대개는 계훈제 선생의 묘소를 입구로 삼는다. 그는 평생을 일제와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고, 통일운동에 헌신한 민주화운동의 대부다.
지형을 따라 부채꼴 모양으로 봉분이 늘어서 있어, 동심원을 그리며 좌우로 오가는 편이 좋다. 부채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곳에 노회찬 전 의원이 있고, 양쪽 끝에 문익환 목사와 그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의 묘소가 묘역을 품듯 자리하고 있다. 맨 위에는 박종철 열사의 초혼 묘와 아버지 박정기 선생의 묘소가 나란히 있다.
그들을 점으로 연결하면 납작한 마름모꼴이고, 그 중심이 전태일 열사와 백기완 선생의 묘소다. 두 분이 잠든 터가 실상 묘역의 안마당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유신 정권에 고문사 당한 최종길 교수,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한 박래전 열사, '중대 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의 도화선이 된 김용균님의 묘소 등이 한데 모여 있다.
'불꽃처럼 살았다.' 이곳 모란공원 묘지의 묘비에 가장 많이 새겨진 글귀다. 오래 살았든 요절했든 그들의 생애는 '불꽃'이라는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들의 목숨 건 투쟁은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었고, 곡절 많았던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온 끌차였다.
범상치 않은 삶도 삶이지만, 이곳에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건 그들이 숨졌을 때의 나이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다. 36세, 33세, 25세, 22세, 심지어 15세까지. 그들은 이미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지만, 이곳에선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누구라도 그들 앞에 서면 지나온 삶을 성찰할 수밖에 없다. 대학 시절의 약속과 다짐을 잊지 않았는지, 일상에 치여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과연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들보다 두세 배나 더 살았는데도 '나잇값' 못하고 있다는 자책에서다.
그게 싫어서일까. 듣자니까, 기념일이나 기일이 아니면 평소 5·18 묘지나 이곳을 찾는 발길이 거의 없다고 한다. 평일인데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머물렀던 세 시간 동안 묘역에서 마주친 이라곤 딸과 손주의 손을 잡고 찾아온 어느 할아버지 가족이 전부였다.
방문객이 뜸해선지, 먼지 수북한 묘비와 곁에 세워놓은 플라스틱 표지판은 색이 바랠 대로 바래 만지면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군데군데 무덤의 주인을 찾는다는 안내문까지 펄럭이고 있어 비감하기까지 했다. 화창한 봄 날씨였지만, 언뜻 을씨년스럽게 느껴진 이유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날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