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도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서울옥션
최제우는 동학의 교통을 유지하고자 옥중에서도 자신의 가족보다 후계자로 점찍은 최시형에게 "고비원주(高飛遠走) - 멀리 피신하라"고 유언으로 남긴 채 참살 당하였다.
이와는 다른 기록도 있다. 평생을 동학(혁명)연구에 바치고 최근 별세한 이이화의 견해이다. 최시형은 스승의 지침에 따라 산간마을을 다니며 포교활동을 하던 중 최제우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최시형은 대구로 몰래 들어와 감옥의 옥졸을 매수해서 옥졸의 차림새를 하고 밥을 들고 감옥의 최제우에게 접근했다. 최제우는 담뱃대를 최시형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받아들고 대구 감영을 나와 담뱃대를 쪼개보니 심지(心紙)에 '고비원주(高飛遠走:멀리 달아나라)'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또 "등잔불이 물 위에 비칠 적에 희미하다고 탓하지 말라. 기둥이 말라비틀어진 것 같지만 버틸 힘은 있는 것이니라"라는 싯귀도 적혀 있었다.
그 일루의 희망을 최시형에게 걸고 멀리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라는 뜻이리라. 최시형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달아났고 그리하여 최제우의 시체를 거두지도 못하였고, 함께 죽은 도인들의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주석 6)
최시형은 스승의 참형 소식을 듣고 심장이 에어왔다. 감성이 무뎌졌다. 분노를 삭일 시간도 없이, 마음의 일렁임을 안고서 스승의 가르침을 되살리고 유품을 정리하여 동학을 확산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기로 다짐한다. 72세로 처형당할 때까지 35년 동안 변함없이 매진하였다.
모든 조직의 기본은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신뢰에 있다. 해월 신사는 관으로부터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스승인 수운 대신사의 유족이나 동지들을 한 때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늘 대신사의 유족을 보호하였으며, 혹 동지가 체포되었을 때는 이를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심고(心告)를 드리고, 구출을 위하여 늘 최선을 다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에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견고한 신앙의 고리가 구축되어 있었다. (주석 7)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제자와 교도들이 핍박을 받고 관리들이 두 눈에 쌍불을 켜며 뒤쫓고 있는 상황에서 최시형이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많은 배움을 받았고 스스로 깨달음을 더해 동학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하였다.
"해월 신사는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동학적 수련에 임하므로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해월신사로 하여금 동학의 지도자로 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었고, 나아가 수많은 교도들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을 지니게 한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다고 하겠다." (주석 8)
최시형은 동학을 이끌면서 기본을 '사람 섬기기'에 두었다. 그의 리더십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 내 제군들을 보니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가 많으니 한심한 일이요, 도에서 이탈되는 사람도 이래서 생기니 슬픈 일이로다. 나 또한 이런 마음이 생기려면 생길 수 있느니라. 이런 마음이 생기려면 생길 수 있으나 이런 마음을 감히 내지 않는 것은, 한울님을 내 마음에 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주석 9)
주석
3> 『도원기서』
4> 『동경대전』, 「시문편」.
5> 김삼웅, 『수운 최제우평전』, 236~237쪽, 두레, 2000.
6> 이이화, 「최시형」,『인물한국사』, 258쪽, 한길사, 1988.
7> 윤석산, 앞의 책, 38쪽.
8> 앞의 책, 26~27쪽.
9> 『천도교경전』, 「해월신사법설ㆍ대인접물」, 278쪽.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