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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동물 동맹, 우생학-자본 동맹 넘을 수 있을까?

[종을 넘어서는 연대 ④] 동물권 × 장애인인권

등록 2021.07.19 09:44수정 2021.07.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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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서로 다른 종(種)이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네 가지 '인간동물 X 비인간동물' 이야기가 있다. 먹이로, 반려동물로, 동물원 전시품으로, 야생동물로 '인간동물'이 지구에서 살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비인간동물'들. 우리는 과연 그들과 제대로 만나고 있을까?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비인간동물과의 공존을 실천해온 '네 마리' 인간동물의 이야기를 통해 종을 넘어서는 연대를 모색한다.?[편집자말]
☞이전 기사 : '그만 죽여라' 202n년 버전이 없어지는 날을 꿈꾸며 http://omn.kr/1ufoe

태어나지 않았어도 되는 존재?

어느 날 집에 들어가 보니 낯선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놀고 있었다. 누나가 지인에게 받아온 선물이라고 했다. 정성의 크기란 쉬이 가격으로 증명되기 때문일까? 누나는 이 강아지가 엄청 귀한 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값싼 녀석만도 아님을 강조했다. 잘 돌볼 자신이 없어 내키진 않았지만, 이 녀석의 작은 몸이 내뿜는 귀여움 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곧 이 녀석에게는 '인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후로 15년간의 긴 동거가 시작됐다. 

하루는 지친 맘을 달래며 인이와 씨름(?)을 하며 놀던 중, 문득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귀여운 것일까? 귀여움은 그것의 강렬함 만큼이나, 그 정동(情動)에 스며든 피의 흔적들을 효과적으로 감춰낸다. 내가 인이의 귀여움을 평온히 누려온 그 일상에도 실은 지난한 피의 역사가 배어 있는 건 아닐까? 

인이의 '생산 목적'은 애초부터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기 위함'이다. 상당수의 '애완동물'은 주인의 과한 돌봄 없이는 최소한의 생존조차 불가능한, 문자 그대로 '장애화 된=불능한(dis-abled)' 특징을 귀여움으로 포장한 채 '생산'된다. 심지어 인이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품종 상 가질 수밖에 없는 병'을 오래 앓기도 했다. 어쩌면 19세기 영국 귀족들이 시도한 애완동물 생산의 우생학적 메커니즘은 '반려동물은 상품이 아니다'란 구호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장 이 '귀여운 상품'만 하더라도, 이윤 창출을 향한 자본의 체계적인 기획-제조-홍보-유통 과정이, 그리고 그 과정에 조용히 스며든 우생학의 그림자가 암묵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은가.

이제 와 생각해보면 참 잔인하지만, 당시엔 분명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 같다. '이 녀석은 태어나지 않았어도 되는 존재가 아닐까?' 역설적으로 자본이 인이를 태어날 자격이 있다고 여겨 탄생시켜 놓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인이의 '불능한/장애화 된 귀여움'이란 생물학적 존재의 고정된 속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려인의 존재, 더 나아가 이 사회와 인이가 어떠한 관계를 맺어가느냐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은 것은 내가 장애인운동을 만나고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상당수의 ‘애완동물’은 주인의 과한 돌봄 없이는 최소한의 생존조차 불가능한, 문자 그대로 ‘장애화 된=불능한’ 특징을 귀여움으로 포장한 채 ‘생산’된다 ⓒ 이미지투데이

 


우생학, 그리고 '이미 태어난' 존재들

장애인은 오랫동안 태어날 자격 자체가 문제시 되어왔다. 그리고 우생학은 그러한 자격의 유무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우생학과 쉽게 등치되는 나치의 인종 정화 기획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실은 지금까지) 전 세계를 휩쓴 우생학 열풍의 한 흐름이었을 뿐이다. 지역과 시대마다 구체적 모습은 각기 다르긴 했지만, 어쨌거나 우생학을 인구 관리의 핵심 기조로 삼은 여러 국가들은 모두 '비정상인들'을 태어나지 않게 하고, 건강한 인구를 태어나게 하는 데 집중했다. 근대에 '노동할 수 없는 이'를 분류하기 위하여 새로이 범주화된 이들, 즉 장애를 가진 몸(dis-abled-body)이 이 보편적 자연법칙(?)에 따라 '태어나지 않아야 하는 존재'의 범주로 가장 먼저 묶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의 태어날 자격 기준을 누가 감히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장애란 결코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장애는 어떠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가에 따라서 그 개념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에서만이 흑인은 노예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장애인 역시 어떠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느냐에 따라 상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장애인은 '태어날 자격 없이 태어난 존재'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여느 존재가 그러하듯 그 개별 존재 자체로 다양한 존재의 가능성이고, 더 나아가 다양한 세계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더 확장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의 존재 자격과 등급에 대한 '과학적(?)' 판정이 아니라, 타자들과 어떠한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라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타자들 간의 끈질긴 고민과 실천이다.

반려동물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은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차원에서 반려동물에게 우생학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장애인은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서 태어나지 않아야 할 존재로 규정되지만, 반려동물은 대개의 경우 순혈성 보존, 귀여움, 멋짐의 발현 등의 이유로 '장애화' 될 때 더 태어날 가치가 있는 탓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장애화'에는 곧 특정 종에 대한 인위적인 개량 작업이 포함된다.

그러나 '종의 생산 과정'이 갖는 폭력을 지적하기 위하여 그 종에 속하는 개별 존재자의 '태어날 자격'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각 개별자들은 그 종에 속했다고 간주되지만, 실은 그 종의 특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미 태어난 자들'이 자본과 우생학이 설정한 '생산 목적'을 넘어선, 심지어 그 생산 목적에 대립하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타자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새로이 발현해 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현 상품 생산의 메커니즘에 대한 저항의 단초가 될 수 있진 않을까?

동물운동과 장애인운동, 새로운 연대를 위하여

최근 동물운동과 장애인운동 간 만남이 미약한 수준에서나마 종종 논의된다. 그러나 양 운동진영이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류 동물권 운동은 '비장애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 중산층 소비자 운동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고, 장애인 운동 진영은 비장애중심주의적 사회에 의한 자신의 '동물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동물 폄하 표현들을 구호로 활용해 오기도 했다. 비인간-동물에 대한 억압이 결국 '정상적 인간 이하의 존재'에 대한 차별 내지 착취 양상과 맞닿아 있기에,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그래서 장애인 운동과의 만남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이제는 꽤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그 내용도 추상적이고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연대의 가능성이 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탄생의 자격 기준'을 정하는 기존 권력 작동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비로소 마련될 수 있고, 마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모든 존재는 자본의 쓸모에 따라 존재의 자격 기준을 평가받고 등급화된다. '우생학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섣부른 낙관에도 불구하고, '태어남/태어나지 않았어야 함'의 기준은 여전히 장애인/비-인간 동물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관통한다. 굳건한 우생학-자본 동맹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모든 존재를 등급화하고 상품 가치로 환원하는 이 동맹의 '모든 존재들의 생산과정'에 대한 지배권을 우리 손으로 탈취해 오지 않는다면, '비정상적 존재로 낙인찍힌 자'들과 '한낱 완구가 된 생명체'의 동시적 해방은 결코 도래할 수 없을 것이다.

2년 전 인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인이만 나에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인이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인이는 그것의 생산 목적으로 가정된 '(장난감으로서) 귀엽다'는 술어에 가둬지지 않을 정도로 나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갔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둘 간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매 순간 다르게 성립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이의 '생산목적'을 넘어선 다양한 가능성들을 함께 꾸려왔으면서도, 왜 단 한 번도 그가, 그리고 비-인간 동물들이 진정으로 해방된 세상을 상상해 보지 못했을까? 

 

우생학-자본 동맹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비정상적 존재로 낙인찍힌 자’들과 ‘한낱 완구가 된 생명체’의 동시적 해방은 결코 도래할 수 없을 것이다 ⓒ 이미지투데이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정창조 님은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이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간사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2021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동물권 #장애인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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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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