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계속되는 가운데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시민이 휴대용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연합뉴스
연일 폭염주의보 안내 문자가 날아오는 요즘이다. '푹푹 찐다'는 표현을 누가 만들었는지 제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잠시만 밖을 나가도 어느새 내 몸은 잘 익은 호빵이 된 듯 열기를 잔뜩 머금고 축 내려 앉는다.
하지만 이 순간, 아무리 대단한 표현의 달인도 에어컨을 만든 사람보다 존경 받을 순 없다. 에어컨은 여름이 되면 숭배하게 되는 축복 수준의 성물. 뜨거운 여름의 원인에 이 성물이 뿜어내는 열기도 한몫 한다는데, 애써 모른 체하며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는 것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곳에 모여 숨만 쉬어도 산소가 모자란 느낌의 우리 집은 여섯 식구가 함께 산다. 네 아이의 힘찬 들숨 날숨이 얼마나 격한지, 거기다 열기는 덤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은 에어컨을 일찍부터 가동시켰다. 아파트 1층에 터를 마련한 터라 창문을 열기도 부담스럽고 열어둔들 밤새 어린 이슬에 습도만 높아져 체감 온도만 올라간다.
사실 습도가 더 문제다. 에어컨을 세게 틀면 너무 춥고 적당히 틀면 눅눅한 공기 탓에 냉방 효과도 줄어들고 감기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제습기 없이 에어컨만 틀다 집안 곳곳에 생겼던 곰팜이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래서 에어컨과 제습기의 콜라보레이션이 필요해진다. 냉기를 퍼트리는 동시에 습기를 잡아야 그나마 안전하게 냉방 효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사용할 땐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조금만 세게 틀어도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과 무릎이 시려오는 나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집 강골은 역시 아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혼자만 쌩쌩하다. 아무래도 아이 넷과 어른 아이 하나를 돌보는 엄마여서 그런지 그 강인함이 남다르다.
아무튼, 에어컨은 최고 강력한 모드로 온 집안을 얼려버리겠다는 기세로 시작해서 어느 정도 냉기가 돌면 27도를 맞추고 풍향을 30도 각도로 천장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제습기를 가동시켜 냉기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습기를 제거하면 내가 찾은 우리 집 최적의 냉방 시스템이 완성된다. 적당히 시원한 쾌적한 상태. 이만하면 살만하다.
"나가자" 시위대 탄생
그런데 요즘 이 최적의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들이다. 등하굣길에 뜨거운 뙤약볕에 그렇게 그을리고 겨드랑이에 샘물을 만들어 오면서도 기회만 되면 나가자고 시위를 한다.
한쪽에 앉은 둘째가 "나가고 싶다... 나가고 싶다.." 그러고 나면 저쪽에 드러누운 셋째가 "공원 가서 자전거 타고 싶다..." 그리고 분위기에 편승한 막내가 동그란 눈을 뜨고 "공원에서 물놀이 하면 재미떠요" 한다. 이 환상의 콤비들.
하지만 이런 시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는 그 뒤에 있다. 너무 더워 안 된다는 말에 장착하는 '지나치게 서운하다는 듯 시무룩해지는 표정'. 이게 진짜다. 아... 마음이 이상해진다. 괜히 안돼 보이고 미안해지고 대신에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측은지심이 마구마구 일어나고 만다.
이럴 땐 첫째의 동조가 필요하다. 때마침 열사병과 일사병을 배워 온 아이에게 너무 더운 여름날 나가 놀면 위험하지 않느냐고 간절한 눈빛으로 묻는다. 하지만 아이는 "물 많이 마시고 모자 쓰면 되지 않을까요?"라는 대답으로 내 힘을 빼고 만다. 도와줄 줄 알았던 첫째의 배신이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얘네 모두 한통속이다!
코로나 핑계도 하루 이틀, 어쩔 수 없이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영화 시청과 팝콘 제공. 평소 TV를 자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주효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딜에 응했고 하루는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어디 그날 하루만 여름인가. 한동안 비가 오는 것이 고마울 정도로 날은 더웠고 자연스레 바깥출입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등하굣길 외출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아이들의 외출 욕구도 커져 갔다.
땀 한 방울 나는 것이 싫어 집안에서의 동작을 최소화하고 땀 흘린 아이들을 씻기는 것이 버거워(X4) 뛰지 않는 것이 어떠냐며 진지하게 권하기도 했던 나는, 오디오북을 듣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름은 원래 더운 거잖아. 더우면 땀이 나는 건데... 나 너무 겁먹은 거 아냐?'
나무 의사 우종영 작가는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에서 말한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는 건 오직 인간뿐이라고. 도보 여행을 나서며 짊어졌던 많은 짐이 막연한 두려움인 것을 깨닫고 내려놓음으로써 편안해졌다고.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어째서인지 피하고 싶었던 이 무더위를 '아깝게' 날려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세상 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