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면 호탄리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박만순
그런데 공금석은 6년 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사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1944년에 청진제철소로 끌려간 그는 열병(장티프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됐다. "열병에 걸려 죽을 것 같아요. 저 좀 살려주세요" 동생 공금석의 편지를 받은 공노석은 눈시울을 흘렸다. 그 역시 앞서 남양군도로 징용을 갖다왔기에 그 서러움을 모르지 않았다. 공노석은 돈을 마련해 부리나케 청진제철소로 갔다. 공장 기숙사 안에는 열병에 걸린 사람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멀쩡한 사람도 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감독을 만난 공노석은 "동생을 데려가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며 준비해 온 돈봉투를 슬쩍 밀었다. 감독도 "전시에 인력이 부족하지만 환자의 건강 상태를 생각해 특별히 보내주니, 몸조리 잘하길 바라오"라고 말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빨리 데려가라는 심보였다. 그렇게 해서 공금석을 고향에 데려온 형 공노석은 그해를 넘기지 못했다. 동생에게서 열병을 옮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은 죽고 공금석은 살아 해방을 맞았다. 해방 1년 만에 남로당이 만들어지고, 영동군에서는 남로당이 마을별로 정치사상학습을 진행했다. 양산면에서는 남로당원 김회백(양산면 누교리 지르골)의 주도로 사랑방 정치교육이 실시됐다. 이 모임에 참여한 김철민을 포함, 호탄리 청년 여럿이 남로당 영동군당에 가입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동군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빨치산 투쟁이 벌어졌다. 1949년 빨치산을 궤멸시킨 영동경찰서는 1950년 들어 국민보도연맹 조직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양산면 호탄리에서 보도연맹 가입에 앞장섰던 이는 남로당원 가입에도 총대를 맸던 김회백이었다. '자수하면 국민으로 인정해주고 공산당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던 국민보도연맹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호탄리 청년 6명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버렸다. 형의 죽음을 딛고 살아난 공금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꽹과리 따라온 미군 폭격기
"깽 개개갱 깽개갱 딱." 꽹과리 치는 이가 앞장서고 장고, 북, 징이 뒤따랐다. 호탄리 신기마을에 풍물 소리가 울린 것은 5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 이후 처음이었다. 맨 앞에서 꽹과리를 치며 신기마을로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김철민이었다. 6.25 직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때 우연히 붙잡혀 영동경찰서로 이송 도중 탈출했던 이다. 이후 북한군이 영동군에 내려오자 그의 세상이 된 것이다.
신기마을 사람들은 그런 김철민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가 출세(?)했다고 마냥 박수칠 일이 아니었다. 함께 활동하던 마을 청년들은 이미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장 열심히 활동한 김철민은 정작 죽지 않고 자기 세상을 만났으니, 마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씁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사람들 귀에 '윙'하고 정찰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뒷산으로 모두 대피했다. 잠시 후 '쉭'하는 소리와 함께 '콰광'하는 폭탄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꼬마들은 귀를 막고, 아기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또 한발의 폭탄이 터지면서 초가집에 불이 붙었다. 불은 온 마을로 번졌고, 신기마을 20호는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두 타버렸다.
폭탄 두 발을 떨어트린 전투기는 기총소사를 해댔다. 마을 한가운데뿐만 아니라 인근 야산에까지 이어졌다. 참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연신 났다.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주민들은 자기 집이 불타는데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기마을 전체가 초상집이 되었다. 작은 마을에 보도연맹원 사건으로 6명이나 죽고, 전투기의 폭격으로 가옥이 전소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김철민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가 치는 꽹과리 소리에 전투기가 총을 쏘아대 집까지 타버렸는데도 인민군이 있는 한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김철민은 한 달 동안 양산면 치안대장을 한 후 영동내무서(경찰서) 인사계장을 맡았다. 인민군이 후퇴하기 직전에는 영동군 용화면 분주소장(지서장)을 맡았다.
"아이고 여보. 친정아버지 좀 살려 주시오." 김철민의 아내가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김철민의 처남이 옥천경찰서 경찰이라고, 그의 장인을 영동내무서로 연행해 온 것이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영동내무서 인사계장 김철민은 연행해 온 이들에게 불호령을 내리고 장인을 석방시켰다.
이후 북한군이 퇴각하고 유엔군이 수복하자 김철민은 금산과 공주로 피신했다가 처남의 권유로 옥천경찰서에 자수한다. 처남의 덕택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부역행위와 관련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석방됐다. 그러던 1953년에 그는 영동경찰서에 연행된다. 1950년 7월 말의 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가 양산면 치안대장 시절 한 민간인을 처형했다는 혐의였다.
1950년 당시 미군 포로 한 명과 민간인 한 명이 양산치안대 사무실로 끌려왔다. 민간인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총이 나왔는데 김철민은 순간적으로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조선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치며 그 청년은 세상을 달리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지 않고, 왜 조선민주주의 만세를 불렀지'라는 의구심은 평생 김철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나 인민군 선발대를 죽인 것은 아닐까?
이 사건으로 김철민은 청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에서 열린 2심에서 19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4년이 더 줄어 최종 15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본 것은 1968년이었다.
호탄리 주민들의 화해는 언제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김철민 때문에 죽었어." "왜요?" "아 그 양반이 전부 빨갱이 물들여, 청년들 죽게 만들고 지만 살아났잖어." 한국전쟁 당시 숙부를 잃은 공완석(1939년생, 영동군 양산면 호탄리)은 이렇게 김철민을 원망했다.
하지만 호탄리 청년들의 죽음이 김철민의 책임일까? 그렇지 않다. 양산면 청년들을 남로당에 가입시킨 것은 김회백이었고,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이는 국가의 명령을 받은 대한민국 군·경이었다. 김회백과 사촌 김회일도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임을 당했다. 인공 시절 김철민이 민간인 한 명을 처형했지만, 이 역시 15년의 감옥살이를 해 죄값을 치렀다. 사실은 이렇지만 호탄리 주민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김철민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다.
공완석은 지난 5월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숙부 공금석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는 것이다. 영동군 양산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국가의 진실규명이 이루어져 공완석과 호탄리 주민들의 억울한 마음이 해소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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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동지는 다 죽었는데 혼자 살아남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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