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화사건이 일어났던 영동농업학교
박만순
영동농업학교 학생 몇 명은 준비해간 휘발유를 교실 이곳저곳에 뿌려댔다. 이후 그들은 성냥을 그어 교실에 던지고는 부리나케 뛰었다. 영동농업학교(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의 전신)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교장과 선생 세 명을 배척하는 운동을 하다 퇴학당한 것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1947년 6월 27일의 이 방화로 인해 교실 6칸, 관리실 1칸이 전소되었다.
아무리 이념과 사상이 다르더라도 학생들이 배우는 학교를 직접 불태웠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3년도 채 안 되어 또 하나의 방화 사건이 영동군 양강면에서 일어났다. 오순용(가명) 등 젊은이 12명이 양강지서에 근무하는 순경 주용종의 하숙방에서 휘발유 한 되를 훔쳐 양강초등학교 교실에 뿌려 학교를 불태웠다.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양강초등학교 교사 중 7명이 1948년 5월 초 권고사직을 당하자, 보복하기 위해 방화를 저지른 것이다. 1950년 3월 14일 발생한 이 사건으로 이석철(가명)은 영동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방화에 가담한 다른 이들은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6.25전쟁 발발 직후 학살되었다.
영동경찰서 후원회 서기 임민호(가명)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경찰서장으로부터 후원금 모금 실적이 저조하다고 핀잔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경찰의 복지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경찰 급여는 형편없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도 따갑기만 했다. 일상적으로 민폐를 끼치는 경찰은 주민 입장에서는 외면하고 싶은 경계 대상 1호였다.
별로 맡고 싶지 않았던 영동경찰서 후원회 서기라는 감투를 쓴 임민호는 순경 세 명과 함께 1948년 6월 28일 상촌면을 향했다. 후원금 모금액이 가장 저조했던 상촌면 유지들을 닦달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찾아간 곳은 남기명이 우체국장으로 있는 상촌우체국이었다.
남기명 국장이 "점심시간도 있고 하니 두 시간 후에 드리겠다"고 했지만, 경찰 일행은 그를 상촌지서로 끌고 갔다. 이때 남기명의 막냇동생 남기숙이 따라갔다. 지서에 끌려간 남 국장은 경찰이 휘두른 곤봉 한 방에 뇌출혈로 즉사했는데, 끌려간 지 2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기명의 허망한 죽음이 알려지자 흥분한 고성 남씨 문중 사람들이 상촌지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시신이 지서 밖으로 나오자 유가족들은 "지서가 명당 자리다. 다시 (지서로)가져가라"라며 시신을 지서 안으로 들고 갔다.
이후 흥분한 남 국장의 처 성외갑과 동생 남기숙을 비롯한 남씨 가족 7∼8명이 지서 기물을 파손하고 지서장과 순경들을 구타한 후 사무실 책상다리에 수갑을 채웠다. 그날 오후 영동경찰서 사찰주임과 수명의 경찰이 쓰리쿼터 트럭을 타고 왔는데 남기숙과 남씨 문중 노인들이 곡괭이로 쓰리쿼터를 부수고 경찰들을 무릎 꿇렸다. 경찰은 영동경찰서로 도망쳤다.
남기명 가족은 상촌지서에서 밤을 새우며, 살해 범인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다음 날 경찰은 신문과 라디오에 충북도경찰국장 명의로 "상촌지서에 남로당원들의 습격이 발생했다"며 어처구니없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후 사건은 악화되었다. 경찰 담화문에 분노한 남씨 문중 사람들이 지서에 몰려갔고, 지서장과 순경 집을 뒤졌다. 이 와중에 밀주가 나와 "경찰들이 밀주나 해 먹는다"며 유가족은 더욱 흥분했다.
결국 사태는 윤병완 영동경찰서장이 GMC 트럭에 경찰 50~60명을 직접 대동해 출동하는 지경으로 번졌다. 그들은 상촌지서에 닿자마자 지붕을 향해 실탄을 발사, 경고사격을 날렸다. 지서 앞에 있던 주민들이 달아나자, 면소재지를 돌며 고성 남씨 성을 가진 청년들을 전부 연행했다. 당시 약 300명의 주민이 영동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남구, 당시 24세, 상촌면 유곡리/남우현, 당시 23세, 상촌면 상도대리) 반면 남기명을 폭행치사한 경찰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 남기명 상촌 우체국장 사건을 증언한 남구
박만순
한국전쟁 전에도 빈번했던 민간인 학살
신안갑(당시 30세, 영동읍 임계리)은 1949년 3월 마을에서 김경성(일명 백세)과 이덕환, 손현억과 함께 영동경찰서로 끌려갔다. 이후 신안갑은 고문으로 사망했다. 연행된 지 6~7일 후에 영동경찰서 형사가 손현억과 이덕한에게 "시신 치워라"고 했다. 신안갑은 옷도 걸치지 않았고 담요만 덮인 상태였다. 알고 보니 그는 고문 받다가 불알이 터져 죽었다.
박노성(당시 25세, 학산면 도덕리)은 빨치산을 도와줬다는 혐의를 받고 영동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949년 10월 초 경찰 토벌대가 학산면 도덕리에 오더니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아 놓고 자기들이 가져온 명부를 보며 일일이 호명했다. 이후 박노성은 1949년 10월 7일 영동읍 어서실에서 처형당했다. 어서실에는 큰 구덩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남성 5명, 여성 2명 죽임을 당했다. 어서실은 한국전쟁기에만 학살터로 이용된 것이 아니라 1949년에도 이미 '죽음의 땅'으로 불렸다.
영동경찰서와 용화지서 경찰들은 1946년 10월 2일 영동에서 발생한 추수봉기의 지도자 이필영이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 집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1948년 1월 말 임우영 집을 급습했다. 하지만 이필영은 없고, 심천면 용당리 사는 송재웅이 벌목을 위해 거주하고 있었다. 송재웅은 경찰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 도주를 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아 총상을 입었다. 경찰은 송재웅을 용화면 용화리 창곡으로 끌고 가 둥구나무 맞은편 큰 바위 위에 앉혀 놓고 총살했다. 송재웅의 시신은 가마니에 싸여 용화면 소재지에 며칠간 전시되었다.
이렇듯 충북 영동에서는 한국전쟁 전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이들을 도와줬다는 혐의를 받은 이들이 재판도 없이 경찰에게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빨치산들이 무장을 하고 경찰과 교전 중 사망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여러 사례에서는 비무장한 상태의 활동가와 주민들이 불법적인 죽임을 당한 것이다.
만약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1949년에 법치주의와 인권, 상생의 가치가 올바로 확립되었다면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전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났다손 치더라도 국가에 의한 집단학살이 벌어졌을지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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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후원금 적게 냈다고 곤봉으로 쳐 '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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