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 동안의 삶을 뒤돌아보고 미래를 가늠하게 해준 깜짝 선물!
박미연
'가을을 축하합니다.
편견없는 평평한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 친구 하진(가명)'
남편이 자신을 '나의 친구'로 지칭한 것이다.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왠지 더욱 진정성있게 들려왔다. '평평한 세상'을 바란다는 그의 말 때문이었을까. 지금 세상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겠지. 왠지 한 고개 넘은 듯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 고개를 넘기까지 2년 동안 겪은 불편함, 두려움에 대한 보상이랄까.
결혼 이후, 나는 엄마이자 아내로 사는 것에 대해 딴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을 중심으로 가족에 헌신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희생이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더이상 말해 무엇하리.
그런데 약 4년 전부터 한없이 쪼그라져 있는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빈둥지 증후군? 아니다. 그 당시 난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의 학부모였다. 갱년기 증후군? 그것도 아니다. 난 지금까지 완경에 이르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나의 삶에 돌파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2년 전, 이맘때 즈음 그에게 선언했다.
"20년 이상 부부로 살았으니, 이제는 친구로 살자!"
부부로 산 20여 년, 그와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수 없었다. 위계 구조 가운데 각자의 역할만을 요구하는 삶이었다. 남편으로 아내로, 엄마로 아빠로. 그렇게 살다 보니, 사람은 사라지고 역할만 남더라. 부부라는 틀을 깨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에, 그에게 친구로 살자고 제안한 것이다.
남편에게 야! 너! 할 수 있을까?
지난해에 재난 지원금으로 이불을 사러 갔었다. 나는 가게 안에서 이불을 골랐고, 그는 밖에서 어슬렁거렸다. 최종적으로 결정할 때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랬더니, 가게 주인 할머니의 훈계가 시작됐다.
할머니집 아들 며느리도 캠퍼스 커플이라고 한다. 얼마 전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며느리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더란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황당했던가보다. 며느리에게 아들을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단다. 남편이 집에서 존경받아야 밖에서도 존경받는다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이것이 바로 사회문화적 인식이다.
또 어떤 부부를 알고 있다. 그들은 고등학교 동창 사이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한 친구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하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고 한다. 애들 교육상이라고 하는데...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아내! 아내에게는 남편만큼의 권위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평평했던 친구조차도 부부가 되면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게 되다니!
이런 불평등으로 인해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부부에서 친구로 거듭나는 것은 어떨까. 나는 남편에게 친구로 살자고 선언한 이후, 의도적으로 더 많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도 처음엔 내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편해 했다. 물론 나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난 멈추지 않았다.
하진아! 그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고... 그를 야! 너! 하는 만큼, 그와 나 사이에 있던 넘을 수 없었던 위계가 허물어지며 인간 대 인간, 즉 친구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하고 바람직한 노후대책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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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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