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녀’는 누구의 이름인가요? 일의 세계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거리와 광장에서 우리는 다양한 삶을 오늘도 살아냅니다. 우리가 부딪친 차별의 현실을 지우고 우리의 페미니즘을 시끄러운 예민함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를 향해 우리는 말합니다. 당신이 아는 ‘이대녀’는 없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차별금지법 제정, 더는 미뤄서는 안 됩니다. [기자말] |
언젠가부터 정치권과 언론에서 '이대남', '이대녀'라는 프레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프레임은 선거 패배의 원인을 특정 집단의 표심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으로 돌린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지만, 다양한 층위와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납작하게 바라본다는 점에서도 차별적이었다. 나는 그 프레임에 속하지 않는, 그리고 속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대략 5년 전, '에이젠더'로 정체화했다. 에이젠더란 젠더퀴어(gender queer)의 한 부류로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젠더적 정체성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논바이너리(non-binary)라는 개념이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고, 나는 오랜 시간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라는 범주 중 내가 어디에 포함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퀴어 이론을 접하게 되면서 두 가지 카테고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범주의 정체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중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카테고리를 선택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에이젠더로 정체화했다고 해서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불편함은 내가 나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더욱 나를 옥죄었다.
매일 아침 씻을 때마다,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놈의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몸'의 기준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그 '아름다운 몸'은 현실의 신체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몸이기에.
하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으레 '여성의 몸'에는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와 있는 가슴을, 다달이 하는 생리를, 그 밖에 많은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내 몸에 부착된 '여성의 기표'들을 제거하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끊임없이 그것들은 내게 '네가 아무리 외쳐봤자 너는 여성이야'라고 속삭였다.
성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을 수강하며 들은 말이 있다. "우리는 타인의 성별을 신체로 인지하지만, 정작 우리가 우리의 성별을 인지하는 것은 뇌를 통해서이다." 나의 신체는 나를 여성으로 인지되게 했지만, 정작 나의 뇌는 끊임없이 그 기표가 나와 맞지 않음을 외치고 있었다.
내 몸과 내 머리의 불일치가 한 쪽에 있었다면, 다른 한쪽에는 숫자 2가 있었다. 한국에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1 또는 2라는 숫자로 분류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맨 앞의 숫자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는 간단한 순간부터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하는 순간까지. 남성과 여성, 1과 2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매 순간 절망과 좌절, 거부당하는 감각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다.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 나는 가족에게 아웃팅을 당했다. 가족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모든 책임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강요'한 나에게 있었다.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내 존재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하는 가족마저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라에 충성하는 군인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전역을 강요받는 것을 보면서, 성소수자라서 입학 거부 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절망을 학습해야 했다. 너무 많은 이들을 잃어야 했다.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기는 어렵다. 성전환수술을 받고 나에게 맞는 신체를 갖고 싶지만, 건강보험료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당장 수술을 받을 수 없다. 성중립화장실이 설치된 건물은 너무 드물어서 종종 화장실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언니', '딸'이라는 호칭이 불편하지만 당장을 넘기기 위해 모른 척하고는 한다. 이렇게 나는 종종 나를 속이며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다. 다행히도 내 곁에는 나와 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아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혹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다. "젠더란 허상이기에 당신의 생각은 틀렸다." 내지는 "태어난 대로 사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라고. 그들에게 묻고 싶다. 어떠한 범주가 억압적으로 느껴질 때, 그것이 누군가에게 맞지 않는 것을 넘어서 고통을 주고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하지 않느냐고. 서로의 너무나도 다른 삶을 연대라는 길을 통해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길이 아니냐고.
나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당신이 당신에게 맞는 길을 택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며 또한 용감한 일이다. 앞으로도 가끔 자신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심이 당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신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기에. 그리고 당신을 보며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었기에. 그렇기에 당신에게 응원과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함께 살아남기를, 살아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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