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녀’는 누구의 이름인가요? 일의 세계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거리와 광장에서 우리는 다양한 삶을 오늘도 살아냅니다. 우리가 부딪친 차별의 현실을 지우고 우리의 페미니즘을 시끄러운 예민함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를 향해 우리는 말합니다. 당신이 아는 ‘이대녀’는 없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차별금지법 제정, 더는 미뤄서는 안 됩니다. [기자말] |
포털 사이트에 '이대녀'라는 단어를 검색하고 오래된 순으로 정렬하면 2000년대 중반의 뉴스 기사가 가장 위에 뜬다. 이 시기 사용된 '이대녀'는 '이화여대녀'의 줄임말이다. '여'대에 이미 '여성'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굳이 '녀'를 한 번 더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최근 사용되고 있는, '이십대 여성'이라는 의미의 이대녀는 2021년 4월 9일에 게시된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분석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두 '이대녀'라는 단어가 사용된 맥락은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데, 그런 의미에서 여자대학에 재학 중인 이십 대 여성은 '이중의 이대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일종의 '이대녀 집합소' 여자대학 이야기를 다뤄 보려고 한다. 나는 '숙명여대 법학부 학생'이다. 2020년 2월, 트랜스여성 A님이 합격해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던 바로 그 학교, 학과 소속이다. 그리고 그 당시 숙명여대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의 구성원으로서 A님과 연대하고 학내 트랜스혐오에 맞서는 활동을 이어 나가기도 했다.
나는 여자대학 내에서 내가 경험한 다양한 일들을 일련의 '투쟁'으로 정의한다. 사전상에서 '투쟁'은 '사회 운동, 노동 운동 따위에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고자 견해가 다른 사람이나 집단 간에 싸우는 일'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대녀'들의 투쟁은 쉽게 '투쟁'으로 이름붙여지지 않는다. 투쟁이라는 단어는 대의를 위한, 거창한 일에만 붙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큰 일'의 주체가 될 수 없을까? 그 '큰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투쟁은 왜 투쟁이 아니란 말인가
여자대학은 대상화와 성역화를 동시에 경험하는 특이한 공간이다. 마초적 분위기로 유명했던 모 공대에서는 수 년 전까지 이런 가사의 응원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대생은 우리 것, 숙대생도 양보 못 한다" 여기에서 여자대학의 학생들은 전리품 내지는 물건으로 취급된다.
여대를 다니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사람이다. 그리고 대학은 공부하기 위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여자대학은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공부하기 위해 모인 곳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에 맞서 우리의 선배들은 투쟁해 왔다.
그리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대에 대한 인식이 조금 변화한다. 2017년 숙명여대에 입학한 나는 공대에 재학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여자대학이니까 안전하게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부러움 섞인 이야기들을 자주 들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자대학은 '페미니즘의 성지', '유토피아'로 칭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느 사람 사는 공간이 다 그러하듯 여자대학도 절대 유토피아는 아니다. 여자대학에도 다양한 갈등, 싸움들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맞선 투쟁이다. 두 번째는 잘 드러나지 않는 공동체 내부에서의 투쟁이다. 많은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여자대학 구성원은 모두 페미니스트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사이버불링을 당하거나, 폭력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 다들 같은 '여성' 정체성을 가졌으니까.
물론 이 두 명제는 -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일견 긍정적 의미를 담은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시선 또한 일종의 대상화이다. 이는 '우리는 같은 여성이니까 동일한 입장을 취해야 하며, 늘 서로를 지지하고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또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배제하고, '순수한 진짜 여성'을 가려내려는 분위기로 연결되기도 한다. A님의 입학 포기 과정에서 똑똑히 보았듯이 말이다.
허구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여자대학의 구성원들이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며 다양한 유형의 차별을 경험해 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성들의 삶은 모두 다르다.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여러 의제에 대해 함께 목소리내지만 그 목소리들을 결코 '동일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여자대학이 안전하고 평등한 공동체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여자대학=안전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라는 단순한 정의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우리를 설명하는 말이 단순해질수록, 구성원들의 삶과 우리가 지닌 각각의 이야기 또한 가려지기 때문이다. 여자대학은 더 다양한 여성들, 더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더욱 '시끄러운' 공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이 과정에서 투쟁은 어쩌면 필수적이다. 그 투쟁은 애써 우리의 투쟁을 투쟁이라 이름붙이지 않으려 하는 가부장제와의 싸움일 수도, 투쟁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비도덕적 행위'라 여기는 사회적 시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소수자가 늘 '권력'을 멀리하고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또 어쩌면 암묵적 동의와 무조건적 지지만이 공동체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 마음 속 무의식적 고정관념과의 싸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싸움을 지속해 왔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원동력으로, 사랑하는 공간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의 투쟁은 20대, 여성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쉽게 지워지고, 단순화된다.
하지만 이 사회가 '이대녀'를 어떻게 정의하건, 수많은 '이대녀'들은 각기 다른 다양한 이유로 지금 이 순간에도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20대 여성들을 이렇게 칭하고 싶다.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가능성과 세계를 넓히고자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상처받은 여성들과 연대하기 위해, 더 많은 여성들과 손잡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투쟁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