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백낙용의 동아일보 기자 시절 모습
박만순
백남환이 보리밥 한 숟가락을 입이 미어터지게 넣고 된장찌개를 막 뜰 찰나였다. "백낙용씨 잠시 서에 갑시다." 사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백낙용을 부르는 소리였다. 마루에서 식사를 하던 백낙용 가족은 기겁했다. 밥상에 숟가락들을 동시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백낙용의 부·모, 아내, 동생, 자녀 6명 등 총 12명의 대식구가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충남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에서 1950년 6월 27일 저녁 벌어진 일이다. 그 와중에 백낙용의 동생 백락정과 장남 남환도 시초지서에 같이 연행됐으나, 둘은 그날 저녁 석방됐다.
다음날 백낙용의 아내 김양순은 시동생 락정에게 남편의 속옷을 시초지서에 갖다줄 것을 부탁했다. 백락정이 지서에 가자, 경찰은 "야, 거기다 놓고 가!"라고 했다. 다음날은 음식과 속옷을 가지고 갔다. 경찰의 반응은 전날과 같았다. 3일째인 6월 30일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그제서야 백락정은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그렇다면 백낙용은 그 시각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6월 27일 연행되자마자 시초지서를 경유해, 서천경찰서로 이송됐다. 곧바로 대전형무소로 이송된 그는 다음날인 6월 28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
그가 죽은 6월 28일은 무슨 날인가? 북한군이 남침하고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된 날이다. 이승만이 서울시민을 속이고 대전으로 피난 온 6월 27일의 다음 날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군과 경찰에 형무소에 수감 된 정치·사상범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린 시점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무부 치안국은 충남경찰국에 좌익과 보도연맹원을 검거하고 처리하라는 무선(모스 부호)전문을 하달했다. 그리고 충남경찰국은 대전경찰서와 유성경찰서 등 각 경찰서로, 각 경찰서에서는 각 지서로 이를 하달했다.
당시 충남경찰국 사찰과에 근무하던 서○○은 "6월 25일부터 30일 사이에 치안국에서 무선전문으로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검거해 처단하라는 지시가 충남경찰국으로 하달됐다"고 진술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50년 6월 28일 대전형무소
위의 결정문은 1950년 6월 말 치안국이 전국의 형무소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대전에서 6월 말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위와 관련해 1950년 7월 1일자 미군 전투일지에 유력한 내용이 있다.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됐다." (미 제25사단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 활동보고서)
미 CIC(육군 방첩대) 파견대의 전투일지에 구체적인 날짜가 언급돼 있지는 않지만, 보고서 작성일이 7월 1일이기에 사건 발생일은 6월 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민족의 증언>에도 6월 말에 학살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충남 도지사 공관과, 국무회의가 열리던 충남도청과 대전형무소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대전 산내 골령골과도 수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당시 피난을 온 정부 각료와 고급관리, 국회의원 등은 대부분 대전시내에 있는 여관인 '성남장'에 머물고 있었다.
"7월 1일 새벽에 성남장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충남지사 관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다면서 급히 오라는 호출이 왔어요. 성남장에서 지사 관저로 오면서 보니까, 벌써 대전시가 발칵 뒤집혀 있어요, 모두 제정신이 아니예요."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1권, 1983, 이선근 정훈국장
대통령 이승만은 6.25 전쟁을 맞이해 전란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까를 고민하지 않았다. 한강다리를 폭격해 500여 명의 서울시민을 학살하고 자신은 대전으로 도망갔다. 대전으로 가면서 결정한 것이 대한민국과 자신에 부정적인 집단의 절멸(絶滅)이었다. 즉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사상범과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 하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위의 기록과 증언에 더해 대전 산내사건 유족들 중 자신의 가족이 6월 말에 학살(제사 일 기준)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대전 산내사건의 최초 발생일을 1950년 6월 28일로 진실규명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날짜에 쐐기를 박는 일이 생겼다. 백낙용의 사망과 관련해 '단기 4283년(1950년) 6월 28일 時不詳(시불상) 대전형무소 사망'이라고 명기된 문서가 나왔다. 백낙용의 제적등본이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생한 최초 시기의 학살 피해자가 문서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군작전일지와 증언으로만 언급되던 피해 날짜가 문서로 검증되는 역사적인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