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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다 끌려가 실종... 동아일보 기자 아들의 최후

강제로 얻은 감투가 '살생부'로, 대전 산내 최초 민간인학살 피해자 백낙용

등록 2021.12.25 12:17수정 2021.12.2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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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상포사 김철주(가명)는 자전거를 타고 부리나케 시초면 풍정리로 향했다. 시초면에 사는 지인이 풍정리에 상(喪)이 났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상을 당한 백현수(1879년생)는 시초면의 유지로 김철주도 아는 이였다.

백현수 집안의 내력을 아는 김철주는 가슴 한편에 싸한 감정을 안고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밟았다. 경쟁업체인 다른 상포사보다 먼저 상가에 조등(弔燈)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조등을 거는 상포사가 장례 일체를 주관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풍정리 상가는 여느 집보다 곡이 처량했다. 망인(亡人)의 큰 며느리 김양순이 구슬프게 곡을 했지만, 정작 그의 남편이나 시동생들은 한 명도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삼일장의 마지막 순서인 출상(出喪)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양순이 망인의 관을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고 아버님. 이렇게 가시면 원통해서 어떻게 해요. 아들이 넷이나 되면서 며느리 손에 출상을 나가시니..." 삼일 내내 곡을 한 그녀가 결국 출상을 앞두고 혼절한 때는 1955년이었다.

이승만이 대전으로 피난하며 제일 먼저 한 일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백낙용의 동아일보 기자 시절 모습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백낙용의 동아일보 기자 시절 모습박만순

백남환이 보리밥 한 숟가락을 입이 미어터지게 넣고 된장찌개를 막 뜰 찰나였다. "백낙용씨 잠시 서에 갑시다." 사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백낙용을 부르는 소리였다. 마루에서 식사를 하던 백낙용 가족은 기겁했다. 밥상에 숟가락들을 동시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백낙용의 부·모, 아내, 동생, 자녀 6명 등 총 12명의 대식구가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충남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에서 1950년 6월 27일 저녁 벌어진 일이다. 그 와중에 백낙용의 동생 백락정과 장남 남환도 시초지서에 같이 연행됐으나, 둘은 그날 저녁 석방됐다.

다음날 백낙용의 아내 김양순은 시동생 락정에게 남편의 속옷을 시초지서에 갖다줄 것을 부탁했다. 백락정이 지서에 가자, 경찰은 "야, 거기다 놓고 가!"라고 했다. 다음날은 음식과 속옷을 가지고 갔다. 경찰의 반응은 전날과 같았다. 3일째인 6월 30일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그제서야 백락정은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그렇다면 백낙용은 그 시각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6월 27일 연행되자마자 시초지서를 경유해, 서천경찰서로 이송됐다. 곧바로 대전형무소로 이송된 그는 다음날인 6월 28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

그가 죽은 6월 28일은 무슨 날인가? 북한군이 남침하고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된 날이다. 이승만이 서울시민을 속이고 대전으로 피난 온 6월 27일의 다음 날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군과 경찰에 형무소에 수감 된 정치·사상범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린 시점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무부 치안국은 충남경찰국에 좌익과 보도연맹원을 검거하고 처리하라는 무선(모스 부호)전문을 하달했다. 그리고 충남경찰국은 대전경찰서와 유성경찰서 등 각 경찰서로, 각 경찰서에서는 각 지서로 이를 하달했다.

당시 충남경찰국 사찰과에 근무하던 서○○은 "6월 25일부터 30일 사이에 치안국에서 무선전문으로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검거해 처단하라는 지시가 충남경찰국으로 하달됐다"고 진술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50년 6월 28일 대전형무소


위의 결정문은 1950년 6월 말 치안국이 전국의 형무소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대전에서 6월 말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위와 관련해 1950년 7월 1일자 미군 전투일지에 유력한 내용이 있다.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됐다." (미 제25사단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 활동보고서)
 
미 CIC(육군 방첩대) 파견대의 전투일지에 구체적인 날짜가 언급돼 있지는 않지만, 보고서 작성일이 7월 1일이기에 사건 발생일은 6월 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민족의 증언>에도 6월 말에 학살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충남 도지사 공관과, 국무회의가 열리던 충남도청과 대전형무소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대전 산내 골령골과도 수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당시 피난을 온 정부 각료와 고급관리, 국회의원 등은 대부분 대전시내에 있는 여관인 '성남장'에 머물고 있었다.
 
"7월 1일 새벽에 성남장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충남지사 관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다면서 급히 오라는 호출이 왔어요. 성남장에서 지사 관저로 오면서 보니까, 벌써 대전시가 발칵 뒤집혀 있어요, 모두 제정신이 아니예요."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1권, 1983, 이선근 정훈국장

대통령 이승만은 6.25 전쟁을 맞이해 전란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까를 고민하지 않았다. 한강다리를 폭격해 500여 명의 서울시민을 학살하고 자신은 대전으로 도망갔다. 대전으로 가면서 결정한 것이 대한민국과 자신에 부정적인 집단의 절멸(絶滅)이었다. 즉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사상범과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 하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위의 기록과 증언에 더해 대전 산내사건 유족들 중 자신의 가족이 6월 말에 학살(제사 일 기준)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대전 산내사건의 최초 발생일을 1950년 6월 28일로 진실규명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날짜에 쐐기를 박는 일이 생겼다. 백낙용의 사망과 관련해 '단기 4283년(1950년) 6월 28일 時不詳(시불상) 대전형무소 사망'이라고 명기된 문서가 나왔다. 백낙용의 제적등본이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생한 최초 시기의 학살 피해자가 문서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군작전일지와 증언으로만 언급되던 피해 날짜가 문서로 검증되는 역사적인 상황이다.
 
 1950년 6월 28일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명시된 백낙용의 제적등본
1950년 6월 28일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명시된 백낙용의 제적등본박만순
 
국민보도연맹 서천군 지부장이 된 동아일보 지국장

"당신 서천군수 해라." "싫습니다." 경성고보 출신의 백낙용은 조선총독부에서 권유한 서천군수 자리를 과감하게 내팽개쳤다. 그런 후에 고향인 서천군으로 내려와 동아일보 지국을 차렸다.

그런 그가 1950년 초 국민보도연맹 서천군지부장을 맡은 연유는 무엇일까? 백낙용은 1947년 9월 서천경찰서에 검거됐다. 이유는 '포고령 2호' 위반이었다. 경찰이 취재를 불허한 집회를 동아일보에 기사화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1948년 2월 17일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았다. 석방 후 약 2년 만에 국민보도연맹 서천군 지부장이 됐다. 사실 백낙용은 좌익활동한 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좌익계열의 집회를 신문에 냈다는 것만으로 구속되고, 강제로 국민보도연맹 지부장이라는 감투를 쓴 것이다.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하면 공산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국민보도연맹 명부는 6.25가 발발하자 살생부(殺生簿)로 변했다. 예비검속 영순위가 된 백낙용은 대전형무소로 이송돼 산내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

그렇다면 백낙용의 나머지 3형제는 왜 아버지의 출상을 지켜보지 못했을까?
 
 포고령 2호 위반으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백낙용의 판결문(1948년 2월 17일자 판결문)
포고령 2호 위반으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백낙용의 판결문(1948년 2월 17일자 판결문)박만순

백낙용 집안이 겪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형제 중 막내 낙규는 일제강점기에 징용대상자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했고, 이후 소식이 두절됐다. 둘째 낙정은 앞서 보았듯이, 시초지서로 연행된 형 낙용을 수소문하다 행방불명됐다. 행불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정황상 경찰에게 학살됐을 확률이 높다.

셋째 낙효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차출됐다. 그가 의용군에 입대할 때 그의 조카이자 낙용의 장남인 남환도 같이 입대했다. 그런데 남환은 북으로 후퇴하는 도중 대열에서 이탈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낙효는 이후 소식이 두절됐다.

그 결과 백낙용 4형제는 아버지 백현수의 임종과 출상을 지키지 못했고, 백낙용의 아내 김양순이 남편과 시동생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이로써 백낙용 집안의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백낙용의 어머니 조정구도 장남의 죽음에 화병으로 사망했다. 남편 백현수가 죽기 몇 달 전인 1955년이었다.

사실 조정구(1878년생)는 조선의 신여성이었다. 비록 신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책과 학문을 가까이한 그녀는 만 17세인 1895년에 고소설 <어룡전(魚龍傳)>을 썼다. 이 소설은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글로 쓴 '구비소설'이다. 조정구의 소설은 기존에 최초의 '어룡전'이라고 밝힌 필사본보다 23년 먼저 쓰여졌다.

아버지 백낙용이 1950년 6월 27일 시초지서로 연행될 때 같이 끌려갔다 석방된 남환은 죽음의 문턱에서 1차로 살아났다. 그러다가 그해 8월 말경 의용군에 강제로 입대했다가 '대열'에서 이탈했다. 하마터면 총알받이가 될 뻔했던 상황에서 벗어났다.
 
 백낙용의 어머니 조정구가 쓴 고소설 <어룡전>
백낙용의 어머니 조정구가 쓴 고소설 <어룡전>박만순
 
물고기밥이 될 뻔하다

불행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던 백남환이 자칫 물고기밥이 될 뻔했던 것은 그로부터 9년 후였다. "북괴의 북송사업을 저지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귀관들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지급될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재일조선인을 북한으로 영주 귀국시킨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은 1959년에 시작됐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극력 저지키 위해 한편으로는 전국에서 반공시위를 조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특공대(?)'를 조직해, 이들을 일본에 침투시켜 북송사업을 방해하는 활동을 펼칠 계획을 수립했다.

"형님이 내무부 치안국의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저지를 위한 경찰특공대'에 자원했어요. 당시에는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면 경찰 고위직으로의 특채와 엄청난 경제적 보상을 해 준다고 했어요." - 백남식(1949년생,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경찰특공대' 60명은 밀항을 해야 했다. 부산에서 통통배 10척에 나눠탄 이들은 불행하게도 현해탄에서 절반가량이 물고기밥이 됐다.

백남환은 천만다행으로 일본에 도착했지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 적발됐고, 오무라수용소에서 2년간 격리됐다.

백낙용 집안 식구들이 법치주의가 확립된 사회에서 살았다면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단과 한국전쟁, 남북의 체제경쟁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은 죽임과 행방불명, 국가폭력, 연좌제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모두 경험해야 했다.
#대전형무소 #보도연맹 서천군지부 #의용군 #북송사업 #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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