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자료사진
연합뉴스
바야흐로 대선의 시기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출마 후보들의 약속이 쏟아지고 있다. 보따리를 푸는 후보들은 모두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며 인심 좋은 표정으로 웃는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국민 모두가 만족하는 공약이란 없다. "노동유연성"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를 더 확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더 이상 안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각자 서 있는 세상에서 바라보면 넘치는 것은 당연하고 부족한 것은 한없이 작아 보인다. 노동유연성 같은 말이 무슨 대단한 사회과학 용어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사용자 맘대로 노동자를 자를 수 있게 한다는 살벌한 말을 순화한 것에 불과하다. 무릇 유권자라면 지역, 혈연, 학연이라는 썩은 넝쿨을 치워버리고 내 삶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호환, 마마, 전쟁, 불법 비디오 테이프 같은 것들이 아이들 정서에 영향을 끼치던 시절 교통 공약은 도로나 철도를 놓거나 지역구 역에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정차시키겠다는 정도였다. 철도로 한정해보면 역대 가장 큰 교통공약은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의 경부고속철도건설 공약이었다. 4조 5천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91년 착공, 98년 완공이라는 청사진이 발표됐다.
하지만 노선 결정 과정부터 졸속과 부실이 이어져 건설비는 4배 이상 초과한 18조 원이 넘게 들어갔다. 완공 시기도 6년이나 늦추어졌고 그나마도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1단계 구간이었다. 프랑스로부터 고속열차 차량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오갔던 거대한 비자금은 권위주의 정권에선 양념 같은 것이었다.
고속철도 개통 이후 한국철도는 두 가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하나는 산업화 시기 줄곧 사양길을 걸어왔던 철도가 국가기간교통망으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신자유주의가 철도에 이식된 것이다. 철도정책을 수립하는 고위 관료들은 한국이 따라야 하는 모범 사례를 유럽과 일본의 철도에서 가져왔다.
관료들 입장에서 선진국 방식은 큰 고민 없이 채택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이었을 것이다. 한국철도가 당면한 현실과 과제는 1990년대 자유화 물결 아래 진행된 유럽의 철도 구조개편이라는 프리즘으로 굴절됐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린 199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시장만능주의가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한국철도의 문제는 독점으로 프레임화 되었고 이를 타개할 경쟁체제가 대안으로 제기된다. 또 무사안일한 국가나 공적 소유보다는 효율성 있는 민영 철도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자리 잡았다. 결국 민간경쟁체제, 다수의 민영 철도가 경쟁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이상적인 철도가 된다.
이 같은 기본 철학은 현재의 국토교통부도 견지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재인 정권 5년간 시도된 철도 개혁을 시종일관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속철도 개통을 통한 철도 부흥이 투철한 신자유주의 신념에 사로잡힌 관료들을 만나 국가교통체계의 조화와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새 정부는 이런 현실을 타개해야 한다.
철도 개혁 첫걸음은 코레일과 SR 통합
한국철도의 기초에 균열이 생긴 가까운 사례는 수서고속철도(SR)의 출범이다. 국토부 관료들과 일부 학자들은 SR 출범이 국민편익을 위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용자들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불편들이다. 당장 이용자들은 승차권 구매나 예약 과정에서부터 코레일과 SR의 두 개 앱을 사용해야 하는 불편을 호소한다. 그깟 앱 하나 정도 더 깔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 열차 이용자 입장에서는 굳이 필요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더 황당한 문제도 있다. 경부와 호남 고속선만 운행하는 SR은 그 자체로 고속열차의 대국민 혜택을 제한하고 있다. 고속선이 깔려있지 않은 전라선, 경전선, 동해선 연선의 주민들은 수서행 고속열차를 탈 수 없다. 이들 지역에서 수서로 가려면 중간에 환승을 해야 하며 환승에 따른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네트워크 산업이 인위적으로 분리됐을 때 나타나는 폐해다. 지난해 국토부는 전라선에 SRT를 투입하겠다고 나섰다. 수리 중인 산천 1편성을 고치는 대로 전라선에 운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국토부는 전라선 이용 주민을 위한 편익 제공 차원이라고 했다. 시민사회단체와 철도노조는 진정 국민편익을 위한다면 열차 운용에도 여유가 있는 KTX도 투입해 전라선뿐만 아니라 동해선, 경전선까지도 수서행 열차를 운행하자고 제안했다. 국토부는 20만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이뤄진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국토부는 SR의 영업노선 확대를 통한 알박기로 고속철도 통합 논의에 쐐기를 박으려 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국토부가 생각하는 국민편익의 정의가 궁금하다. SR 사장 중에는 국토부 퇴직 후 16일 만에 부임한 사람도 있다. SR은 관료편익의 대표적 사례에 더 가깝다. 페인트 색만 다른 열차가 경쟁이란 허울 아래 한국철도를 좀먹고 있다. 네트워크 산업의 통합 구조가 갖는 건실함을 더 늦기 전에 확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