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고소장에 성적수치심 꼭 써라? '이상한 법령'에 갸우뚱한 피해자들

디지털성범죄전문위 "법령에 성차별적 용어 다수, 중립적 표현으로 교체해야"

등록 2022.03.24 16:58수정 2022.03.24 16:59
2
원고료로 응원
a

법무부 디지털성범죄전문위원회가 24일 8차 권고안을 발표했다. ⓒ 픽사베이

 
"성폭력 사건 고소장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했다. 여기저기서 성적수치심이라는 말을 꼭 써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듣다가 나도 성폭력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혼란, 당혹, 분노 등이 뒤늦게 몰려왔다. 과거의 시간을 복기해봐도 당시 성적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성적수치심'이란 단어에 대해 지난해 8월부터 9월까지 전화인터뷰를 통해 청취한 의견 중 일부다. 피해자의 구체적인 피해사실을 축소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는 비판에 국회와 법원, 검찰에 이르기까지 '용어 개선'에 나섰지만, 여전히 성폭력 처벌법 등의 법령엔 '성적 수치심'이란 단어가 남아 있다. '수치심'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이다.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위원장 변영주)가 24일 8차 권고안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직접 적용되는 형사 사법 영역의 다수 법령에 (성적 수치심 등) 성차별적 용어가 여전히 존재해 시급한 개선이 필요하다"면서 중립적 표현으로 교체할 것을 권고했다.

"성범죄 평가 대상, 피해자 감정 아닌 가해자 행위에 맞춰야" 

구체적으로는 성폭력처벌법 13조 등에 적시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말' 대신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 말'로 대체하자는 의견이다. 전문위는 "대체 용어로 성적 불쾌감, 성적 모욕감 등도 제시됐지만 가해자 행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가해 행위 중심의 성 중립적 표현이 보다 적정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법무부 소관 법령으로, 수사 과정에서 적용되는 법규 또한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봤다. 형 집행법 시행 규칙의 경우, '성적 수치심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부분을 '성적 욕망 내지 만족을 위한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언동을 하는 행위'로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성적 수치심'이라는 단어가 남아있는 실제 법령을 찾아보면 성폭력처벌법과 아동성보호법 외 ▲아동복지법 ▲노인복지법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장애인 복지법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장애인 차별 금지 및 권리 구제 등에 관한 법률 등에도 남아 있는 상황이다. 법령에 따라 판결문이 작성되는 만큼, 피해자들은 해당 용어를 신경쓸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 전화조사에 응한 한 참여자는 실제 소송 과정에서 변호사를 통해 겪은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관련 토론회 발제문에 따르면 이 참여자는 "(변호사가) 현실적으로는 (성적수치심을 써서) '법적으로는 이렇게 말해줘야 알아 듣는다' '일종의 업계 전문용어처럼 써야 알아듣는다'라고 했다"면서 "시험문제가 잘못됐지만 오답을 말하고, 원하는 답만 써야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전문위는 통계도 제시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8년 교수, 검사, 판사, 경찰, 변호사, 비정부기구 등 전문가 4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 또는 '성적 모욕감'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응답에 각각 65.2%, 63%로 높게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관련 문제 의식은 입법기관인 국회에도 이미 공유돼 있는 상태다. 전문위에 따르면 관련 법안만 13건이 발의돼 이미 계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위는 "성적 수치심은 과거 정조 관념에 근거한 개념으로 평가 대상이 가해자 행위가 아닌 피해자인 것으로 오인하게할 만한 소지가 있다"면서 "가해자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중립적 개념을 설정해 용어를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1차 권고안 : 성범죄피해자 '두 번 고통'에 "원스톱 창구·독립기구 마련" http://omn.kr/1vg9w
2차 권고안 : 온라인도 '응급상황' 있다 "법 바꿔 디지털성범죄 초기 차단해야" http://omn.kr/1vn3t
3차 권고안 : 몰카 아니라 불법촬영... "법무부,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http://omn.kr/1w3zk
4차 권고안 : 껍데기만 '엄정'... 성착취물 소지 402건 중 실형 '0건'
http://omn.kr/1wr66
5차 권고안 : 온라인 성착취... 늘어나는 '비접촉' 성범죄, 처벌은? http://omn.kr/1x3x9
6차 권고안 : 피해자에 "성경험 있냐" 묻는 판사, '있는 법으로 충분' 하다는 국회
http://omn.kr/1xl2s
7차 권고안 : "감방 가도 원본 남는다면", '성착취물' 수사 검사들의 걱정 http://omn.kr/1xv7r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입사했습니다. 유익하면서도 재밌는 기사 쓰고 싶습니다. 제보는 그래서 언제나 감사합니다. jhj@ohmynews.com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부끄러운 행보... 위험한 성적표
  2. 2 이동관 아들 학폭 덮은 하나고, 법 위반 정황에도 검찰 '무혐의'
  3. 3 "침대에 눕혀서 밟았다"...'학폭' 이동관 아들, 학폭위 없이 전학 명문대 진학
  4. 4 50만 명 모인 반정부시위...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았다'
  5. 5 '노시니어존 논란' 마주친 노인이 한 마디 할게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