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옥 선생 최양옥
국사편찬위원회
이처럼 신덕영·최양옥·노석정·노석중·노형규·정수현 등 조선독립 군자금 모집원은 전원 체포되었다. 그런데 신덕영은 체포되기 전에, 많은 군자금을 모아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신덕영은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양옥은 징역 7년형을, 노석정은 징역 7년형을, 노형규는 징역 5년형을, 노석중은 징역 5년형을, 정수현은 징역 6개월형을 각각 언도받고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들 독립운동가 6명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훈장을 받았다. 신덕영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최양옥(1893∼1983)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노석정(1892∼1967)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노형규(1876∼1947)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노석중(1875∼1954)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정수현(1887∼미상)은 201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조선독립 군자금 모집 사건'이 일어나던 1920년에 대동단총재 김가진은 75세 나이로 3백만 대동단 단원들에게 독립운동에 나서라는 <포고문>을 작성·배포하였다. 신덕영은 대동단총재 김가진의 포고문과 대동단 본부의 통고문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신덕영은 31세였고, 최양옥은 28세였고, 노석정은 29세였으며, 노형규는 45세였으며, 노석중은 46세였으며, 정수현은 34세였다. 이렇게 김가진의 포고문은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독립운동가 김가진은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되어 있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의 후손들은 김가진의 서훈을 신청하였으나, 번번히 보류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참여 이전 김가진의 행적을 문제 삼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후손으로부터 받은 김가진 서훈 보류 통보 사유를 확인하고 놀랐다. 보훈처는 김가진의 "일제 강점 전후 행적이상(의병탄압, 강제병합 찬양 논란, 수작 등)"을 미포상 사유로 들고 있었다.
첫째, 의병탄압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민종식이 일본헌병대에 의해 1906년 11월 20일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07년 9월 26일(음력 8, 19) 일본군이 이남규를 학살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1907년 5월 13일(음력 4월 2일) 이건영(李健榮)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남규의 학살과 김가진이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둘째, 강제병합 찬양 논란도 선친일·후독립의 서훈원칙에 의거해 볼 때, 부당한 심사이다. 선친일을 적용해, 후독립을 격하시키는 것 자체가 선친일·후독립의 서훈원칙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후독립이 더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기에, 서훈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
셋째, '수작'을 미포상 사유로 제시한 것도, '후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수작자가 '수작'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수작'을 사망선고한 행위이다. 일제강점기에 수작자가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한 자는 극히 적었다. 수작자임에도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한 사람에게 그 행위를 높이 사서, 보훈처가 그 수작자에게 독립유공 훈장을 주어 포상을 한 사례가 있다. 민태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잘한 일이었다.
민태곤(閔泰崑, 1917∼1944)은 1934년 12월 15일 아버지 민규현의 남작 작위를 이어받았다.(「민태곤씨 습작」, <매일신보>, 1934, 12, 16.) "정5위 남작" 작위를 가진 채 민태곤은 1944년 11월 22일 별세하였다.(「민태곤 남작」,「민태곤 부고광고」. <매일신보>, 1944, 11, 24.; '민규현(閔奎鉉, 1900∼1934, 남작', <친일인명사전>1, 806∼807쪽.) 민태곤의 남작 직위는 그 동생 민태륜(閔泰崙, 1924∼2009)이 1945년 2월에 형 민태곤의 남작을 이어받았다.
민태곤은 "1940년 일본 동북제대 문학부에 재학 중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전개"(보훈처 공훈록)한 공로로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가진은 1919년 12월 상하이 민단(民團)이 주최한 연설회에서, 연설을 통해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1921년 4월 북간도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4일 77세의 나이로 서거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장으로 상하이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선 친일'·'후 독립운동'의 경우, 그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 왔다. 김가진의 경우 '선 친일'이었으나, '후 독립운동'에 해당한다. 이제라도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는 김가진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반병률, 「해외에서의 대동단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28, 2004, 봄.
장명국, <대동단 총재 김가진>, 석탑출판, 2022(4쇄).
이용창, 「독립운동가의 생애에 나타난 독립운동과 친일 행적-조선민족대동단과 조선귀족 관련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서훈의 역사와 과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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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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