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진은 왜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되나

[주장] '선 친일'이었으나, '후 독립운동'... 그 공적 인정해야

등록 2022.07.19 14:30수정 2022.07.1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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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와 대한제국에서 30년 관료 생활을 마치고, 일제강점기에 제 발로 독립운동의 심장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찾아간 김가진(金嘉鎭, 1846∼1922) 선생. 김가진은 1919년 3·1운동을 겪고 자신의 삶을 혁명적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우리 민족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던 사실을 알았고, 무도한 일본이 시세의 추이에 상관없이 포악한 만행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맨주먹의 군중을 총으로 죽이고 촌락을 불태우는 등 인간의 양심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만행을 일삼는 것을 목도하였다.

김가진은 1919년 4월 초 전협(1876∼1927)과 상의하여 비밀결사조직으로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5월 20일 세 가지 강령(조선의 영원한 독립을 완성할 것, 세계 평화를 확보할 것, 사회의 자유발전을 널리 넓힐 것)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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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선생 김가진 ⓒ 석탑출판

 
1919년 5월 대동단의 중심인물인 최익환과 이능우, 그리고 권태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자 김가진과 전협은 대동단 본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김가진은 1919년 10월 24일 서울의 집에서 의치(가짜 이빨)를 전부 뽑아 자신의 얼굴 모습을 변하게 하고 또 의복을 고쳐 시골 농민의 풍채로 꾸며, 아들 김의한과 함께 일산역까지 걸어가 기차에 올랐고, 마중을 나온 상해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중국 단둥현을 거쳐 배를 타고 같은 해 10월 30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미리 상해로 망명해온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김가진의 상해 망명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각 단체가 한결 같이 환영하였다고 이렇게 썼다.

"김가진이 먼저 해진 옷과 찌그러진 삿갓을 쓰고 약장수로 분장, 아들 의한을 데리고 출발하였다. 그는 산간벽지에 있는 시골 역으로 걸어가 3등 열차를 타고 안동현에 이른 다음, 거기서 다시 영국 선박에 편승하여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의 나이 75세였으나 지조와 기상은 의연하여 고난과 위험을 회피하지 않으니 임시정부와 각 단체가 한결같이 충심으로 환영하였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하), 서문당, 1999, 134∼135쪽)

상해에 도착한 뒤에, 김가진은 "나는 이곳에 우리민족의 정부가 있음을 듣고 왔노라. 나는 우리 정부가 있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 내가 본래 품은 바다"(「김가진옹 래호」, <독립신문>, 1919, 11, 4.)라고 소감을 밝혔다. 1919년 그의 나이 74세에 결단한 상해 망명은 일제가 1910년 준 남작 작위를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치고 독립운동을 하려고 단행한 일이었다. 일본제국에 막대한 타격을 가한 행동이었다. 목숨을 걸고 한 망명이었다. 잡히면 생존을 담보할 수 없었다. 나이가 많아서 그 의미가 더 컸다.

계속해서 김가진은 중국신문 <대륙보> 기자와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김가진이 이 중국신문과 한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였는데, 김가진의 발언을 그대로 생생히 아래와 같이 게재하였다.


"한족(한민족을 가리킴) 중에는 어떤 계급이나 어떤 부분도 독립을 요구치 않는 자 없나니 독립의 요구는 실로 폭행과 압제 아래에 있는 한족 전체의 절규라. 노동자나 귀인이나 일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광복하기로 결심하였나니 이 결심은 최후의 일인(一人) 생존할 때까지 변치 아니하리라. 일본이 만일 독립의 절규를 없이하려 할진대 한족의 전멸을 도모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으리라."(「최후의 1인까지」, <독립신문>, 1919, 11, 20.)

즉 김가진은 '우리 민족 구성원은 독립을 요구하지 않은 자가 없다. 우리 민족은 최후 한 사람이 생존할 때까지 독립 결심이 변치 아니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던 것이다.

김가진이 전협·나창헌 등과 협의하여 1919년 11월 중 이강을 수령으로 하여 조선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제2의 만세선언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김가진은 자신을 포함하여 33명이 기재된 제2의 독립선언서(일명 '대동단 선언')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선언서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1인까지 혈전(血戰)을 불사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일제는 1920년 1월 김가진의 독립운동전선 참여에 충격을 받아, "남작이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은 일본의 수치"라고 판단하였고, 밀정 정필화를 파견하여 김가진의 귀국을 종용하였다. 김가진은 일본 총독(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의 귀국 공작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제의 김가진 귀국 공작 내용은 김구의 <백범일지>와 정정화의 <장강일기>에 상세히 나와 있다. 다행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국장 김구)이 정필화를 체포하여 교수형을 선고하여 처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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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삼일독립선언 2주년 기념행사. 정면 단상에 김가진 선생이 있음. ⓒ 석탑출판

 
1920년 3월 6일 김가진은 대동단 총재 명의로, 대동단 단원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도록 <포고문>(佈告文)을 작성해 배포하였다. 같은 해 3월 10일 대동단 총부 명의로,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작성·배포하여, 우리 동포들이 "1원의 보조력을 가진 동포는 1원의 군자금을, 1만원의 보조력을 가진 동포는 1만 원의 군자금을" 성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포고문>과 대동단 총부의 <갹금권고문>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운동가들이 나타났다. 

신덕영(申德永, 1890∼1968)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귀국 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그는 1919년 중에 북만주로부터 경성에 들어와서 노형규와 합세하여 전라남도에 대한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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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영 선생 신덕영 ⓒ 보훈처 공훈록

 
1920년 4월경부터 신덕영은 대동단 조선총지부장이라 칭하면서, 화순·광주·곡성 등지에서 칠팔명의 심복을 얻어 가지고, 각지 재산가들에게 먼저 대동단총재 김가진의 포고문과 대동단 본부의 통고문 등을 우편으로 보내어 놓고, 군자금을 가져갔다.
신덕영은 권총이 부족하자 경성에 있는 아내 정수현을 시켜 아이들의 장난감 권총을 몇 자루 사서 여러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덕영은 광주읍내 북문 밖에 사는 노석중을 지휘장으로 임명하여, 자신에게 경찰의 행동과 동지들의 행동과 전보통신 등과 예비조사 등에 대해 기민하게 보고하게 하였다.

1920년 11월 5일 동지 최양옥, 노석정은 담양경찰서 창평주재소 순사에게 체포되었고, 11월 6일 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 계속하여 나머지 동지들도 검거되었다. 같은 해 11월 20일 신덕영도 경성으로 추적하여 온 광주담양 수색대와 전남 제3부 수색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전남에 출몰하던 대동단원 검거, 총재 김가진의 포고문을 가지고 활동하던 단체들'(<매일신보>, 매일신보사, 1920, 12, 21.)이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생생히 보도되었다. 독립운동가 6명의 활약상이 잘 드러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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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옥 선생 최양옥 ⓒ 국사편찬위원회

 
이처럼 신덕영·최양옥·노석정·노석중·노형규·정수현 등 조선독립 군자금 모집원은 전원 체포되었다. 그런데 신덕영은 체포되기 전에, 많은 군자금을 모아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냈다.

신덕영은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양옥은 징역 7년형을, 노석정은 징역 7년형을, 노형규는 징역 5년형을, 노석중은 징역 5년형을, 정수현은 징역 6개월형을 각각 언도받고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들 독립운동가 6명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훈장을 받았다. 신덕영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최양옥(1893∼1983)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노석정(1892∼1967)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노형규(1876∼1947)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노석중(1875∼1954)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정수현(1887∼미상)은 201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조선독립 군자금 모집 사건'이 일어나던 1920년에 대동단총재 김가진은 75세 나이로 3백만 대동단 단원들에게 독립운동에 나서라는 <포고문>을 작성·배포하였다. 신덕영은 대동단총재 김가진의 포고문과 대동단 본부의 통고문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신덕영은 31세였고, 최양옥은 28세였고, 노석정은 29세였으며, 노형규는 45세였으며, 노석중은 46세였으며, 정수현은 34세였다. 이렇게 김가진의 포고문은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독립운동가 김가진은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되어 있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의 후손들은 김가진의 서훈을 신청하였으나, 번번히 보류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참여 이전 김가진의 행적을 문제 삼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후손으로부터 받은 김가진 서훈 보류 통보 사유를 확인하고 놀랐다. 보훈처는 김가진의 "일제 강점 전후 행적이상(의병탄압, 강제병합 찬양 논란, 수작 등)"을 미포상 사유로 들고 있었다.

첫째, 의병탄압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민종식이 일본헌병대에 의해 1906년 11월 20일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07년 9월 26일(음력 8, 19) 일본군이 이남규를 학살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1907년 5월 13일(음력 4월 2일) 이건영(李健榮)이 충청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이남규의 학살과 김가진이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둘째, 강제병합 찬양 논란도 선친일·후독립의 서훈원칙에 의거해 볼 때, 부당한 심사이다. 선친일을 적용해, 후독립을 격하시키는 것 자체가 선친일·후독립의 서훈원칙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후독립이 더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기에, 서훈원칙은 모든 사람에게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

셋째, '수작'을 미포상 사유로 제시한 것도, '후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수작자가 '수작'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수작'을 사망선고한 행위이다. 일제강점기에 수작자가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한 자는 극히 적었다. 수작자임에도 독립운동전선에 참여한 사람에게 그 행위를 높이 사서, 보훈처가 그 수작자에게 독립유공 훈장을 주어 포상을 한 사례가 있다. 민태곤이 여기에 해당한다. 잘한 일이었다.

민태곤(閔泰崑, 1917∼1944)은 1934년 12월 15일 아버지 민규현의 남작 작위를 이어받았다.(「민태곤씨 습작」, <매일신보>, 1934, 12, 16.) "정5위 남작" 작위를 가진 채 민태곤은 1944년 11월 22일 별세하였다.(「민태곤 남작」,「민태곤 부고광고」. <매일신보>, 1944, 11, 24.; '민규현(閔奎鉉, 1900∼1934, 남작', <친일인명사전>1, 806∼807쪽.) 민태곤의 남작 직위는 그 동생 민태륜(閔泰崙, 1924∼2009)이 1945년 2월에 형 민태곤의 남작을 이어받았다.

민태곤은 "1940년 일본 동북제대 문학부에 재학 중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전개"(보훈처 공훈록)한 공로로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가진은 1919년 12월 상하이 민단(民團)이 주최한 연설회에서, 연설을 통해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1921년 4월 북간도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4일 77세의 나이로 서거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장으로 상하이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지금까지 '선 친일'·'후 독립운동'의 경우, 그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 왔다. 김가진의 경우 '선 친일'이었으나, '후 독립운동'에 해당한다. 이제라도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는 김가진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반병률, 「해외에서의 대동단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28, 2004, 봄.
장명국, <대동단 총재 김가진>, 석탑출판, 2022(4쇄).
이용창, 「독립운동가의 생애에 나타난 독립운동과 친일 행적-조선민족대동단과 조선귀족 관련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서훈의 역사와 과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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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가보훈처 #민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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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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