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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4일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등 문화예술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전직 장·차관들의 블랙리스트 사태 책임 공무원 징계 중단 청원을 규탄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제 임기 1년 차잖아요."
"대통령 취임한 지 이제 반 년도 안 지났습니다."
국내 유수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이 이구동성 한탄을 늘어놨다. 지난 9월 24일 '영화제 지원 축소 및 폐지에 따른 영화인 간담회' 직후 이어진 자리에서 만난 영화인들은 김진태 강원도지사와 김홍규 강릉시장의 지시로 현실화된 평창국제평화영화제와 강릉국제영화제의 폐지를 납득하기 힘들어했다.
이들은 5일 개막하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더 많은 영화인들과 언론 앞에 국제영화제 예산 중단 등과 같은 폐지 수순이 어떻게 부당한지 호소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한 계획을 세우는 사이 자연스레 떠올린 공통된 기억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암흑기를 도래하게 했던 2014년 <다이빙벨> 상영 이후 불거진 블랙리스트 사태였다.
영화인들의 트라우마는 강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라도 아시아 최대의 국제영화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트라우마가 '다이빙벨 사태'를 겪은 영화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윤석열 정부 초기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두 개의 국제영화제가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해당 광역·지자체장들은 지자체 예산과 효과 등 경제적 요인을 예산 중단 및 축소의 이유로 내세웠다. 핵심은 4년째를 맞는 국제영화제조차 선출직 정치인들의 의지만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소위 '어공'(어쩌다 공무원)이라 할 선출직 지자체장만의 문제도 아니다.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주체 중 상당수는 '늘공'(늘 공무원)이었다.
영화제는 수익을 내기 어렵고 정부 지원 예산에 의존도가 높은 편이지만, 정부 지원을 받는 다른 문화예술 축제라고 다를까. 다른 장르의 수많은 문화예술인들 역시 이번 평창·강릉 영화제 사태를 어떤 사인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권 및 집권여당과 코드가 안 맞거나, 과거 불화한 전력이 있거나, 정권 비판적인 작품을 포함시킨 축제나 공모전 등을 실행하는 주체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전례로 남을 공산이 크다. 창작자 개인의 상황은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논란에 기름 부은 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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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민주당 이병훈 의원이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전국학생만화공모전 금상 수상작 '윤석열차'에 대한 질의를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문화체육관광부 후원 명칭 사용승인에 관한 규정 제9조 ①후원명칭을 사용하는 행사의 진행 과정에서 승인한 사항을 위반하여 후원명칭을 사용하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경우 또는 거짓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신청서류를 작성·제출한 경우 소관부서는 승인사항을 취소하고 그때부터 3년간 후원 명칭의 사용을 승인하지 않을 수 있다."
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제23회 전국학생만화공모전 금상 수상작인 '윤석열차' 논란과 관련해 "(주최 단체인)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승인사항을 위반했음을 확인했고, 이에 따른 엄격한 책임을 묻겠습니다"란 보도설명자료 안에 강조한 위반 규정이다. 현 정권을 풍자한 작품을 내놓은 진흥원에 후원을 중단할 수 있다는 신속한 통보였다.
갖가지 반응들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권 비판적인 '윤석열차'의 작품 의도를 문체부가 앞장서 완성시켜줬다는 비판부터 고등학생 작품에 '아마추어 정부'가 나서서 일을 키웠다는 지적이 주를 이뤘다. 이 와중에 표현의 자유 실종과 과거 블랙리스트 사태를 떠올리며 민감하게 반응한 이들은 문화예술인 당사자들이었다.
이날 웹툰협회는 입장문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뒤에서 몰래 진행하다가 관련자들이 사법 단죄를 받은 '블랙리스트' 행태를 아예 대놓고 거리낌 없이 저지르겠다는 소신발언(?)은 실소를 넘어 경악할 지경"이라고 꼬집었다.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또한 공동성명에서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를 목적으로 제정한 예술인권리보장법 시행 발표 10일도 지나지 않아 문체부가 예비 예술인의 꿈을 짓밟고 표현의 자유 권리를 침해했다"고 비판했고,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역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자행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판박이 행태"라고 지적했다.
문체부의 으름장은 블랙리스트 사태를 둘러싸고 실행자와 피해자 간 갈등이 봉합되기도 전에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다시 건드리는 꼴이 됐다. 더군다나 학생공모전 수상작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행태 자체가 현 정부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기록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윤석열표 '블랙리스트'에 대한 진지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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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 마스크를 고쳐쓰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BS는 올해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출품되고 극장상영까지 마친 <금정굴 이야기>에 방송불가 판정을 내렸다. 이 판정을 내린 EBS 심의실은 이승만 정권을 판단하는 자막과 관련해 모호한 심의 규정을 들어 이승만 정권 당시 자행된 고양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의 방영 자체를 막아 버렸다.
그 전후로 평창·강릉 국제영화제가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더 나아가 여당인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을 최초 보도한 MBC에 대해 법적 조치를 포함한 총공세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그에 앞서 지난 7월 4일 제11대 서울시의회 개원 첫날 과반을 차지한 국민의힘 시의원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TBS(서울교통방송) 지원 폐지를 골자로 하는 법안 발의였다.
블랙리스트의 작동 방식은 단일하지도 단기간에 예상할 수 있지도 않다. 이명박․박근혜 블랙리스트처럼 '윗선'의 입김이 직접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의 규정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정권의 '입맛'을 헤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때때로 정권의 이념을 공유하는 '늘공'이나 '어공'들이 적극적으로 블랙리스트의 실행 주체가 됐던 예도 수두룩하고, 명예훼손과 같은 법적 조치를 무기로 들고나오기도 한다.
지원 중단이나 배제가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공통점도 존재한다. 가장 먼저 두들겨 맞는 것은 비교적 파급효과가 큰 방송이나 영화제와 같은 대중예술 분야라는 점이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작품을 선보였거나 선보일 가능성이 큰 페스티벌, 또는 그런 방송이나 보도를 이어가는 방송국이 제일 먼저 타깃이 되기 마련이다.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 트라우마를 제대로 환기시킨 문체부는 과거 이명박·박근혜 블랙리스트에 대해 도종환·황희 장관 시절 두 번에 걸쳐 사과한 바 있다. 문체부의 사과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었고 그간 문체부가 내놓은 재발 방지 조치에 대해 피해자들이 얼마나 실효성 있게 느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 가운데 나온 '윤석열차' 논란을 둘러싼 문체부의 대응은 윤석열 정부 임기 동안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악화될지, '블랙리스트'가 또다시 작동되는 건 아닌지에 대한 진지한 우려를 심어줄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지난 4월 후보자 시절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과거의 어떤 악몽 같은 기억이니까 윤석열 정부에서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불과 6개월이 지난 지금, 문체부는 고등학생 창작물에까지 사후 검열과 함께 예산 중단을 시사했다. 블랙리스트 피해자들과 문화예술인들이 과연 박 장관을 신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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