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고 여정남
인혁당사건 열사 추모사업회
나는 ('인혁당사건'의 피고인이 아닌) 여정남 군의 항소심 변호를 맡게 되었다. 그의 1심 변호인이던 강신옥 변호사가 군법회의 변론 도중 구속되는 바람에 내가 '인계'를 받은 셈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검거된 인혁당 관계자들은 주로 대구ㆍ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혁신계 인물들로서, 그들은 민청학련의 유신반대투쟁을 배후조종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그들 피고인 22명 중 도예종ㆍ서도원ㆍ하재완ㆍ이수병ㆍ김용원ㆍ우홍선, 송상진 등 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민청학련사건에서는 유일하게 여정남 군만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주석 4)
인혁당사건의 고문과 조작설에 대해 박대통령과 황산덕 법무장관이 이를 부인하는 가운데 4월 8일 대법원은 8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 날인 4월 9일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감행되었다. 확정판결 다음날 사형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시신도 유족들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은 고문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법적으로 화장을 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여 군은 법정 진술과 항소이유서에서 몸서리치는 고문 협박의 참상을 폭로하면서 억울한 혐의를 벗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마이동풍이었다. 전반적으로 피고인들의 진술은 법정에서조차 제지를 당했고, 피고인 측 증인 신청은 무작정 기각되는가 하면, 검찰 측 증인은 변호인 측에 알리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신문했다.
대법원에서도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975년 4월 8일, 그날 대법원에서 인혁당사건 피고인 중 위의 7명과 민청학련사건 피고인 중 여정남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고, 선고 18시간 만에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가 불귀(不歸)의 몸이 되었다.
그때 여 군의 변호인이던 나 역시 반공법으로 구속되어 그들과 같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들이 저승의 문으로 끌려가던 날 새벽, 나는 그의 형 집행은 꿈에도 모른 채 같은 감옥의 다른 사방(舍房) 마룻바닥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