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반창고가 필요한 곳

초등학교 보건실에서 일합니다

등록 2022.11.29 11:01수정 2022.11.29 11:0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떤 운명적인 손길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던 간호사가 된 것은. 처음 내과 중환자실에 학생 실습을 나간 날, 몸과 마음이 견디지 못해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에서 이유 없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붉은 피와 뾰족한 주삿바늘, 의식이 없는 환자들이 버거웠다.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나름의 신고식을 치른 후 무리 없이 실습을 마치고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병원에서 5년을 버텼다. 심심치 않게 응급상황이 터지고 치유가 어려운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 속에서 녹록지 않은 병원 생활을 했다. 밥 먹을 시간, 생리현상을 해결할 시간조차 빠듯한 와중에 해야 할 일은 끊임없었고 간호사를 찾는 벨은 무시로 울려댔다.

더도 덜도 말고 평범한, 그러니까 스스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실은 건강한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살고 싶었다. 생명력 가득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어린이들이 있는 곳, 제2의 직장으로 학교를 선택했다.

내가 있는 곳은 보건실, 몸과 마음의 보살핌이 필요한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다. 특히나 초등학교 보건실은 크지 않은 상처를 가진 건강한 환자들이 자주 드나든다. 크게 다치거나 고열로 힘들어하는 진짜 아픈 환자도 있지만, 지난번에 왔던 그 학생(단골손님)이 자그마한 증상으로 또다시 방문할 확률이 많은 곳이다. 신체의 일부가 아프기도 하지만 사실은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 그런 곳이 초등학교 보건실이다.

스스로 치유 가능한 강한 면역력을 가진 건강한 학생들이기에 필요한 곳에는 약을 사용하되 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약의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해도 용기를 내 찾아온 학생들을 아무런 조치 없이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

배가 아픈 학생들에겐 배를 꾹꾹 눌러보고 온찜질을 해주거나 평소에도 먹을 수 있는 유산균을 준다. 소독이 필요한 상처가 아니라면 베타딘 대신 생리식염수로 닦아주고, 연고가 필요하지 않다면 바세린을 발라주거나 밴드만 붙여준다.


살짝 부딪쳐 아프다고 오는 학생에겐 타박상약을 바르는 대신 냉찜질을 해주고 손목이나 발목 같은 관절이 아프다면 탄력밴드를 감아준다. 목이나 어깨가 아프다고 하면 간단한 마사지 후 목운동 시범을 보이며 따라 하도록 한다.

머리가 아프다는 학생에겐 비타민을 주고 어지럽다는 학생에겐 물 한 컵을 마시게 한 뒤 5분간 침대에 누워있도록 한다. 아침을 먹지 않아 불편한 거라면 율무차도 타주고 잠이 부족해 머리가 아픈 거라면 눈을 잠깐 붙이는 것도 허용해준다.

먼저 사정(assessment) 해보고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경우에 한해서다. 필요하다면 진통해열제, 감기약, 소화제, 연고 등을 제공하고 보건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면 담임교사에게 연락해 병원으로 보낸다. 다만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방과 후에 조치하도록 안내한다.

건강한 사람들 속에 있고자 했다. 내가 매일 출근하는 곳은 건강을 회복할 탄력성이 충분한 10대 학생들이 일시적으로 아플 때 찾아오는 공간이다. 내 앞에서 어색하게 다리를 절뚝이다가도 보건실 문을 넘어가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다다다다 달려가는 어린이들이 있는 곳,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상처에 눈물 글썽이는 어린이들이 있는 곳, 끊임없이 증상을 만들어내는 단골손님이 존재하기도 하는 곳, 그곳은 진짜 약보다 위약(placebo)이 더 많이 필요한 곳, 바로 초등학교 보건실이다.
덧붙이는 글 주간지 [서산시대] 동시 기고합니다.
#초등학교 #보건실 #보건교사 #간호사 #위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대통령 온다고 축구장 면적 절반 시멘트 포장, 1시간 쓰고 철거
  2. 2 '김건희·윤석열 스트레스로 죽을 지경' 스님들의 경고
  3. 3 5년 만에 '문제 국가'로 강등된 한국... 성명서가 부끄럽다
  4. 4 '교통혁명'이라던 GTX의 처참한 성적표, 그 이유는
  5. 5 플라스틱 24만개가 '둥둥'... 생수병의 위험성, 왜 이제 밝혀졌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