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매 타는 북한 어린이들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생일인 지난 8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황해북도 개풍군의 한 마을에서 어린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다.
연합뉴스
페리 보고서에 담긴 프로세스는 담대한 구상처럼 단계적인 비핵화를 제안했다. 북한이 제1단계에서 미사일 발사를 중지하도록 하고 제2단계에서 핵 개발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또 파격적인 지원도 담았다.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기 전인 제1단계에서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제3단계에서는 북미관계 정상화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1999년 10월 12일 상원 외교위원회 페리 청문회에서는 '미국이 주는 게 많다'는 지적이 나왔다.
담대한 구상은 제1단계에서 포괄적 합의를 통해 로드맵을 안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을 연상시키는 측면 역시 페리 프로세스에 있었다. 프로세스 초기에 북한과의 포괄적 협상을 통해 밑그림을 만들어둔다는 것이었다.
페리 청문회 때도 언급됐듯이 페리 프로세스는 핵·미사일과 대북제재 해제나 북미관계 정상화 등등에 관한 포괄적 협상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북미 양국은 초기 단계에서 포괄적 합의를 추구했다.
이에 관한 양국의 양해가 페리 조정관이 보고서를 발표하기 전에 이뤄졌다. 1999년 5월 17일자 <경향신문> 톱기사 제목인 '북, 포괄협상 수용 시사'에서도 이 점이 나타난다. 포괄적 협상으로 포괄적 합의를 지향하고 이를 통해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협상과 이행을 밟아 나가다는 것이 페리 프로세스였다.
페리 프로세스는 대북제재 해제나 북미수교 같은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북한을 단계적인 비핵화로 끌어들이는 비전을 제시했지만, 이 프로세스의 실제 의도는 북한을 현 상태로 묶어두는 것이었다. 북한을 포괄적 협상이라는 틀 속에 묶어놓고 추가 도발을 막는 게 실제 의도였다.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틀 뒤인 1999년 9월 17일의 기자회견에서 페리는 자신이 내린 북미관계의 결론을 소개했다. 그달 19일자 <조선일보> 4면에 따르면 그는 "다음 결론은 미국이 압력을 가한다고 해서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라며 "우리는 북한을 우리의 희망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대로 다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페리 보고서의 숨은 의도를 노출하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북한을 현 상태로 묶어놓고 추가 도발을 막고자 페리 프로세스를 만들었다는 점은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의 기조 위에서 '적극적 협상도 적극적 압박도 하지 않는' 대북정책을 펼친 사실을 연상케 한다. 또 지금의 바이든 행정부 역시 오바마 때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동일한 민주당 정권인 클린턴 행정부 말기의 기조가 오바마 행정부를 거쳐 바이든 행정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을 현 상태로 묶어두는 것을 의도했기 때문에, 북미관계를 크게 바꿔놓기 힘들었다. 그래서 큰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다. 페리 프로세스가 발표된 지 3년 만인 2002년에 제2차 북핵위기가 터진 것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등장이라는 요인도 작용했지만, 페리 프로세스의 실패에도 기인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질 성과 어려운 구상을 다보스포럼에?
김정일 정권 역시 페리 프로세스의 영향을 받았다. 김대중 정권과 김정일 정권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을 도출한 배경을 페리 프로세스와 단절시키기는 어렵다. 김정일 정권 역시 이 프로세스에 휘말린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김여정 부부장이 담대한 구상을 이명박 정권과만 연관시키고 그 이전과 연관시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을 현 상태로 묶어두는 전략을 가진 바이든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북미관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이는 담대한 구상의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시사한다.
수십 년 전의 페리 프로세스와 닮은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민주당 정권처럼 현상 유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 아래서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통일부가 이런 구상을 다보스 포럼에서 발표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고 실효성도 없어 보이는 구상을 전 세계에 내놓는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