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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납북, 어머니는 행상, 아들은 미군통역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20] 영어는 물론 중국어가 능통한 김자동

등록 2023.03.10 17:13수정 2023.03.1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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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가족 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
김자동 가족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전쟁이 터지자 김자동 가족은 마땅히 피란한 곳이 없어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어머니 고향 예산의 친정 식구들은 이미 서울에 살고 있었다. 얼마 후에는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피란길도 막히고 말았다. 

김자동은 8월 초순에 의용군에 끌려갔다.

"여러 세대가 사는 집에서 방 하나를 빌려 지내는 처지였으므로 숨어지낼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였다." (주석 1)

8월 10일경 강원도 철원에 도착했다. 행군 중에 알게된 중동중학 학생 한 명과 탈주를 감행했으나 지리도 낯선데다 밤이어서 헤매다가 붙잡혔다. 이튿날 황해도 금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다시 의용군에 편입되었다. 

5백 리 길을 걸어 9월 초 해주에 도착했다. 그동안 이질에 걸려 초췌해진 몰골이 주효하여 환자로 처리되고 귀가 조치되었다. 의용군에 끌려간지 50여 일 만에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엄청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귀가하기 전날 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온 청년들에게 끌려간 후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9월에 들어서면서 미군의 서울 공습이 잦아졌고, 15일에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풍문이 들렸다. 


인천 쪽에서 연일 비행기의 폭격소리와 함포소리가 들리던 어느 날이었다. 자동차 한 대가 도렴동 우리집 앞에 와서 섰다. 차에서 내린 건장한 청년 한 사람이 성엄을 찾았다.

"김선생님, 소앙 선생 댁에서 모임이 있으니 함께 가시죠. 모시러 왔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지 못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성엄도 선뜻 응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청년의 그 말이 끝나자 성엄이 내게 준 눈길에서 쉽사리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나는 성엄의 판단에 맡기려는 뜻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엄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소앙 선생 댁에서의 모임'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 성엄의 발길은 마냥 무거워 보였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성엄이었다.
성엄은 그렇게 납북되었다. 소앙도 납북된 것은 물론이다. 안재홍, 조완구, 김규식, 엄항섭, 최동오, 그 외에도 많은 유명 정치인들이 한꺼번에 북으로 끌려갔다. (주석 2)

아버지가 납북된 후 김자동은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가 헌옷 행상을 하겠다며 시장으로 나섰으나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었다. 아들은 취직을 하고자 동분서주했으나 전시 중이라 일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우연히 신문에서 미군 통역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부산으로 가서 시험을 보는데, 시험관이 중국말 할 줄 아는 사람 있느냐고 해서 손을 들었다. 최종적으로 20명 정도가 뽑혔다. 1951년 4월경이다.

부산에서 채용되어 대구를 거쳐 충북 제천으로 가서 미 10군단으로 배치됐다가 다시 원주로 가서 미 7시단 32연대에 배치되었다. 10군단 산하 PWI(Prisoner of War Interrogation)라는 포로심문기구가 있었는데 그곳에 배치돼 포로 심문 통역을 맡았다. 거기서 일 년 정도 근무했는데 포로가 거의 없어서 일이 없었다. 두 달에 한 건 정도가 고작이었다. 게다가 타이완에서 온 통역이 하나 있었는데 중국말은 그가 거의 다 했다. 근무 여건은 최상이었다. 하루에 담배 한 갑씩 배급을 받았으며 세 끼 식사는 물론 초콜릿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군과의 차별대우도 전혀 없었다. 당시 전선은 교착 상태여서 별 이슈도 없었다. (주석 3)

그는 여기에서 주로 신문 번역 업무를 담당하였다. 1년여 동안 지내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요량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지인의 도움으로 영등포에 있는 전쟁포로이전센터(PW Transit Centry)로 가서 조사업무를 맡았다.  

미군 CIC 중에서 본부인 308 CIC에는 통역이 일고여덟 명 정도 됐다. 부대장이 중령이었고 대위, 중위 각 1명에 하사관이 여러 명 있었다. 이들은 전부 계급장을 달지 않고 다녔다. 현역 이외에 문관도 스무 명 정도 있었다. 전체 한국인 근무자는 서른 명 정도였다. 사무실은 취산호텔에 있었다. 산하에 여러 군데 CIC를 두고 있었다. 한번은 강릉 CIC로 출장을 갔다가 강릉 공군비행장 대장으로 있던 백범 차남 김신을 만나기도 했다. (주석 4)

영어는 물론 중국어가 능통한 김자동은 당시로서는 한국인 가운데 최상급 통역으로 채용되고 월급도 많이 올라서 대우가 좋으니까 그만두기 싫었다고 한다. 1952년 4월경에 취직해서 1954년 5월까지 근무했다.  


주석
1> 김자동, <임정의 품안에서>, 404쪽, 두꺼비, 2012.
2> 정정화, 앞의 책, 301쪽.
3> <회고록>, 260~261쪽.
4> 앞의 책, 26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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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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