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어머니 정정화 여사 품에 안긴 김자동 선생
김자동
아들의 취업으로 한시름 놓았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시련이 닥쳤다. 남편과 함께 납북된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의 집에 들렀을 때 우연히 만나 김선근이란 여성이 셋집에 두어 차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가 당국에 체포되었는데, 북에서 온 첩자이고, 그와 만난 정정화의 죄명은 부역죄란 것이다. 당시 '부역'이란 죄명은 국사범과 같이 단죄되는 무거운 죄에 속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끌려간 곳이 망명시절 독립자금을 마련하고자 밀입국했다가 검거되어 갇혔던 종로경찰서였다.
종로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왜놈 경찰의 손에 이끌려 붙잡혀 왔던 바로 그 종로서였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종로서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내 심정은 갈갈이 찢겨갔다. 왜놈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와 부역죄로 동포 경찰관의 손에 끌려 들어갈 때를 견주어 보아 모든 게 너무나 달랐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숨김없이 모든 걸 얘기했다. 숨길 것도 속일 것도 잡아 땔 것도 없었다. 담당 수사관도 내가 숨기는 것이 없다는 걸 눈치 채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조사가 그것으로 끝날리는 없었다. 그렇게 쉽게 끝나서는 안 될 성질의 사건이었다. 내가 쉽게 잡혀오긴 했으나 내가 잡혀왔다는 것이 내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까닭에서다.
조사는 계속되었고, 조사과정에서 내게 손찌검을 하는 자도 있었다. 일정 때부터 같은 일에 종사하는 자임에 틀림없었다. 해방된 지 6년이 지난 당시에도 일본 경찰 출신들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심지어 경찰 고위간부직까지도 부일 협력자가 자리에 턱 버티고 앉아 있는 형편이었다. (주석 5)
정정화는 경찰서에 갇혀서, 귀국할 때 함께하였던 약산 김원봉의 부인이 떠오르고, 1947년 중부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당했다는 김원봉의 비극이 겹쳤다.
김원봉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시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 의해 체포되었다. 장택상은 김원봉과 그 세력을 증오하고 있었다. 장택상의 부친 장승원은 경북 칠곡의 대지주로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광복회원에게 불응하다가 처단되었다. 이 원한 때문에 장택상은 진보적인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 김원봉을 수도청에 구금하였다.
귀국한 후 임정계에서 이탈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했다가 47년 8월 월북했다. 그의 월북은 수도청장 장택상이, 일정시 독립자금 모금차 국내에 들어왔던 애국단 단원 박상진에 의해 부친 장승원이 갹출 불응으로 피살된데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그를 비롯한 진보적 해외지도자들-장건상·김성숙 등을 수도청에 구금한 것이 직접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월북한 것 같다. (주석 6)
노덕술은 일제의 대표적인 악질 경찰관이다. 동래경찰서 고등계 형사를 거쳐 평남 소숙 보안과장, 통영시 사법주임, 경기도 경찰서 고등계 형사주임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붙잡고 심한 고문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재빨리 수도청장 장택상에 빌붙어 미군정 경찰로 복직하고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변신하였다. 미군정 경찰이 된 노덕술은 일경 출신 경찰간부들과 항일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시켜 반민특위 요원들의 암살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1949년 1월 25일 반민특위 검찰이 노덕술을 체포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석방할 것을 지시하면서 정부와 반민특위의 갈등이 첨예화하고,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폭거가 있었다.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어 갖은 수모를 당한 뒤 집에 돌아온 김원봉은 "전 의열단원 유석현에게 와서 꼬박 3일간을 울었다." (주석 7)고 한다.
약산은 일제 군경이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붙잡으려 하였지만, 끝까지 잡히지 않고 치열하게 일제와 싸워 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고등계형사 출신의 경찰과 친일파들에게 붙잡혀 철창에 갇히고, 온갖 수모와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니, 어찌 3일 낮과 밤을 울지 않을 수 없었겠는가.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한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주석 8)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김원봉이 구속되고 수모를 당하게 된 정치적 배경에 관해 언론인 송건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에서의 혁혁한 항일투쟁 경력에 빛나는 김약산을 포섭하고자 이승만은 윤치영을 시켜 수차 접촉을 시도했으나 일제시대의 항일노선이 전혀 달랐던 김약산으로서 이승만의 포섭 공작에 응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김약산을 미워하게 되고 어느날 그는 집에서 일제시대의 악질 경찰간부 노덕술에 의해 잡혀 수갑을 채이고 수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약산은 그때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친일역적 노덕술에게 수갑을 채여 애국광복단원에 살해된 장 모의 아들인 장택상 앞으로 끌려간 것이다. 그곳에서 약산은 수일간 온갖 수모를 당한 후 석방되었다. (주석 9)
정정화는 검찰에 기소되고 철창에 갇혔다.
"자동이가 전방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 나는 죄수의 몸이었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 앉았다. 아들은 울었다. 아들의 눈물은 뜨거울까? 내것보다 더 차거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스물 셋의 나이인 아들의 눈물은 뜨거워야 한다고 빌었다.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주석 10)
유신시대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이병린 변호사의 도움으로 정정화는 5년 구형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6.25는 내게 처참하거나 극심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슬그머니 성엄을 빼앗아 갔고, 맹랑하게 나를 한 달 동안 감옥에 집어넣었었다. 그리고 나를 주저앉히게 만들었다." (주석 11)
정정화는 풀려 나오면서도 나랏일이 걱정되었다. 독립운동의 샛별과도 같은 백범은 암살되고, 약산은 구속되어 수모를 겪다가 북으로 올라가버렸다. 자신이 겪은 고충을 아무 것도 아닌 듯 했다. 하지만 나랏일이 크게 걱정되었다.
주석
5> 정정화, 앞의 책, 312~313쪽.
6> 송남헌, <해방 3년사 1>, 202~203쪽, 까치, 1985.
7> 송건호, <한국현대사>, 252쪽. 두레, 1986.
8> 한상도, <1920년대 의열단의 노선정비과정>, <독립운동사의 제문제>, 223쪽. 범우사, 1992.
9> 송건호, 앞과 같음.
10> 정정화, 앞의 책, 312쪽.
11> 앞의 책,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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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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