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집단자결의 현장 중 한 곳인 치비치리가마내부에는 아직도 유골 등이 남아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박광홍
집단자결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각지의 격전지에서 반복됐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에 따라, 연합군에 저항할 전력을 상실한 일본군 패잔병 다수는 자결을 선택했다. 특히 사이판이나 오키나와와 같은 지역에서는 이 집단자결에 다수의 민간인이 휘말렸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1/4에 달하는 주민이 목숨을 잃었던 배경 중 하나가 바로, 전투 막바지에 횡행했던 이 집단자결이다(관련 기사:
"주민 넷 중 하나가 죽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국민들).
집단자결은 전쟁 중에 숭고한 애국적 행위로 예찬됐다. 즉, 귀신·짐승(鬼畜)과 같은 적에게 붙잡히는 치욕을 당하기보다 '천황폐하의 신민'으로서 의롭게 죽었기에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전후 평화헌법이 정착되고 인권의식이 신장되면서 극단적 인명경시이자 국가폭력이라는 틀 안에서 바로잡혀 가게 됐다. 그리고 현재 군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빠진 채 '비극적 집단자결'이라는 미사여구만이 교과서에 남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오키나와 지역과 시민사회가 우려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가해자성과 책임을 가리고 차세대에 그릇된 전쟁관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교과서 검정이 재검토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오키나와 각지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죽음의 현장들이 뒷받침한다. 필자는 박사과정 연구의 일환으로 3월 9일부터 13일까지 오키나와를 방문해 여러 전적지들을 답사했는데, 여기서 도출해낸 가장 주요한 화두는 바로 '자결'이었다.
'육군병원'이라는 이름의 생지옥
일본육군 병원이 위치했던 오키나와 남부 하에바루(南風原)에서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듯하다.
일본육군은 미군 상륙에 앞서 하에바루 지역에 여러 인공동굴을 파고 여기에 15~19세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히메유리 학도대를 간호요원으로 투입했다. 이후 4월 1일에 미군이 오키나와 본도에 상륙하고 전투가 격화되면서 하에바루 지역의 동굴들은 부상병들로 가득차게 됐다.
'육군병원'이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으나, 절망적으로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 부상병들은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없었다. 식량은 하루에 한 번 배급되는 조그만 주먹밥 하나가 전부였다. 조명조차 없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환부엔 구더기가 들끓었고 급기야는 광증을 보이며 날뛰는 이들까지 속출했다. 어린 여학생들은 포화 속에서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부상병들의 대·소변과 잘린 팔다리, 시신들을 나르며 혹사를 감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