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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유족입니다

[일본史람] 기록 없이 스러진 외종조부, 원폭 사망자로 국립 추도기념관에 이름 올리기까지

등록 2023.04.13 04:55수정 2023.04.13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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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4년이 다 돼 간다. 친가와는 일절 교류 없이 성장했던 내게 외할아버지는 할아버지 그 자체였으며 때때로는 아버지와 같았다. 나는 성장하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할아버지가 몸소 체험하셨던 역사에 대해 종종 질문하곤 했다. 1945년 해방 때 '국민학교' 3학년생이던 할아버지의 삶은 그야말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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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함께(2017년 2월) 할아버지는 1945년 해방 때 국민학교 3학년생이셨다. 이후 4.3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체험하며 사셨다. ⓒ 박광홍

 
자신의 창씨개명 이름은 "야스모토 타다히로"였다는 이야기, "일제시대 때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면 손바닥을 맞았다"는 이야기 등에서 나는 일본이 당시 조선인들에 일본 천황 충성을 요구하던 '황민화 정책' 실상을 어렴풋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4.3사건 이야기에 비하면 일제시대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때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쏴죽이지는 않았다"며 토벌대의 만행에 치를 떠셨다. 제주도민들에 대한 폭력의 주체는 토벌대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폭도(무장대)들이 산에서 내려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소를 끌고 갔다"고 말씀하셨다. 도민들은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보호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중학생의 할아버지는 토벌대에 의해, 돌담 쌓기 작업이나 죽창 들고 보초서기 등에 동원되기도 하셨다. 무자비한 폭력의 굴레 속에서 4.3사건의 불씨가 꺼져가는 듯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할아버지가 징병된 것은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강원도 최전방의 추위는 뼈까지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된 방한장구와 식량은 없었다. 당시 군에서 배식되던 식사는 현대 반려견들의 먹이만도 못한 수준이었다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제주4.3,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 관통한 할아버지... 일본 '학도병' 종조부 이야기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참으로 험난한 시대를 사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장남이셨기에 더욱 더 무거운 책무를 감내하셔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할아버지께 원래 형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할아버지를 방문해 자세히 여쭤보니, 할아버지의 형님 분(즉 내게는 종조부님)의 사연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식민통치기에는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터를 잡았다. 증조할아버지 역시 도쿄에 건너가셨는데, 할아버지 역시 증조할아버지의 도쿄 생활 중 출생하셨다고 한다. 이후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 가족들은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당시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할아버지의 형님, 충만은 그대로 도쿄에 남았다고 한다.

충만은 시를 좋아하는 문학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조차 사치였던 전란의 시대였다. 제국 일본이 무모하게 도발했던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급기야는 대학생들에 대한 징병유예 조치를 철회하고 '학도출진'을 강요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충만 역시 학도출진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충만이 배속된 곳은 히로시마였다. 히로시마는 주요 군수도시이자 장차 다가올 '본토결전'의 핵심병력 중 하나인 일본육군 제2총군이 위치한 곳이었다. 히로시마에 도착한 후, 충만은 제주도 집으로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 남겨진 충만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도시는 폐허가 됐고, 14만 여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충만이 속했던 제2총군 역시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그 후로 충만의 연락이 다시 제주도 집에 닿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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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내를 걷는 일본군 패잔병(1945년 9월). 사진출처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Wayne F. Miller 촬영.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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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원폭돔 원자폭탄 투하 당시 반파된 상태로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다. ⓒ 박광홍

 
가족들은 충만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일본 당국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전사 통지는 없었다. 원폭 투하로 히로시마의 행정력이 붕괴된 탓에, 신원미상의 수많은 희생자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해버리게 됐다.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던 끝에, 결국 가족들은 충만이 원폭투하로 사망했다고 믿게 됐다. 장남의 책무는 충남의 동생 충광, 즉 나의 할아버지에게 돌아가게 됐다.

국민학교 3학년생에 불과하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형님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형님의 사진 한 장도, 히로시마 배속 후 형님이 보냈다는 편지의 실물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동생의 기억 끝자락에 희미하게 새겨진 실루엣이 전부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201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것으로 문학청년 강충만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완전히 사라졌다.

사진도 편지도 없이 사라진 종조부... 원폭 사망자로 등록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형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자식들에게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학도출진과 원폭 투하에 이르는 이야기는 오직 손자인 내게만 해주신 것이라고 한다. 즉, 나는 홀로 할아버지의 기억을 계승하게 된 셈이다. 그 계승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일본으로 유학을 온 지도 4년이 흘렀다. 그동안 난 주변의 연구자들에게 혹은 인터뷰이들에게 종종 할아버지 형님의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했다. 할아버지 형님의 존재를 실증할 수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가끔 히로시마에 방문하고 원폭 관련 자료관이나 기념관을 갈 때마다 나는 무력감과 자책감을 느꼈다.

지난 4월 8일, 나는 오랜만에 '국립 히로시마 원폭 사망자 추도기념관'을 다시 찾았다. 추도기념관에서는 그간, 원폭 사망자들의 사진과 정보를 수집해 그 넋을 위로하고 방문객들에게 비핵화와 평화의 중요성을 전해왔다.

그러나 나는 상술했던 이유로, 실증할 수 없는 할아버지 형님의 위패를 이곳에 마련할 수 있을지 회의해왔다. 실제로 추도기념관에 모셔진 기존 명단들은 원폭 사망자들의 실존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사진과 정보들을 모두 갖춘 것들이 태반이었다. 사진이 없는 사망자 정보만이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그나마도 다른 인적사항들은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날은 어디서 무슨 용기가 생겼던 것일까. 나는 추도기념관 사무실 앞에서 한동안 망설인 끝에 창구를 찾아가 사망자 등록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신청서를 작성하면서도, 반려될 각오를 다지며 펜을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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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히로시마 원폭 추도기념관에 제출한 신청서 함께 제출할 수 있는 사진도 없었고, 다수의 항목에 불명, 알 수 없음을 기재할 수 밖에 없었다. ⓒ 박광홍

 
사망자 성명: 강충만(康忠滿). 창씨개명 야스모토 타다미츠(康本忠滿). 성별 남성.
생년월일 불명. 사망년월일 불명.
신청자와의 관계: 친척(종조부)
피폭 시 주소: 조선 제주도
신분: 군인. 소속: 제2총군.
피폭구분: 알 수 없음

강충만님은 제 할아버지의 형님으로, 돌아가신 저의 할아버지에 따르면 강충만님은 내지(内地)의 대학 재학 중 학도출진을 하게 되어 히로시마에 배속되었습니다. 히로시마에 배속되고 나서 제주도 본가로 편지를 보냈다고 하지만, 원폭 투하 후 연락이 두절되면서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당시 저의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3학년생에 불과한 나이였던지라, 형님에 관한 자세한 기억은 갖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사진도 없고 정보도 빈약하지만, 검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위와 같이 작성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를 받아든 사무직 직원 분은 잠시 신청서를 살펴보더니 내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신청서를 둘러싸고 직원들이 모여 낮게 토의하는 것을 보며,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다. 역시 무리였던걸까.

한참 뒤, 직원 분이 신청서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신청서 기재 내용들에 대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직원에게 분명하게 확인해드릴 수 있는 정보는 종조부님의 조선이름과 창씨개명 이름뿐이었다. 다른 명단에서는 대부분 갖추고 있는 피폭 장소, 피폭 시 상황, 하다못해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것인지 피폭 시에는 히로시마 밖에 있다가 이후에 히로시마로 들어와서 방사능 후유증으로 변을 당한 것인지 등의 질문에도 나로서는 답변할 수 없었다. 그 궁색함은 '알 수 없음' 항목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으로 매듭을 짓는 수밖에.

'알 수 없음'이 가득한 신청서는 뜻밖에도 반려되지 않았다. 직원은 '신청서 내용을 잘 종합해서 원폭 사망자 명단에 반영하겠다면서 등록절차가 완료되면 우편으로 공지하겠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너무나도 놀랐다. 내가 예상했던 답변은 '실례지만 강충만님이 원폭 사망자라는 증거가 불충분해 등록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였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종조부님의 존재가, 일본의 국립 추도시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게 형언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나는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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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망자 추도 기념관의 메세지 일본의 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망자 추도 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쓰여있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히로시마에는 35만명을 전후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이 많이 있었으며 중국인도 있었는데 특히 반강제적으로 징용되어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국 및 동남아시아 출신 등의 유학생들과 미군포로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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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망자 추도 기념관의 메세지 일본의 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망자 추도 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쓰여있었다. "여기에 원자폭탄에 의해 돌아가신 분들을 진심으로 추도함과 동시에 잘못된 국가정책에 의해 희생된 많은 분들을 생각하며 그러한 참화가 두번 다시 되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후세에 전하고 국내외로 널리 알려 하루라도 빨리 핵무기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이끌어 나갈 것을 맹세합니다." ⓒ 박광홍

 
제국 일본의 무모한 전쟁, 미국의 원폭 투하... 이름없이 스러진 수많은 사람들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종조부님께서도 기뻐하시겠지. 흔적없이 증발해버린 종조부님의 존재를 찾고 할아버지가 생전에 품고 계셨던 마음의 짐을 덜어드린 것만 같아 코가 시큰해졌다.

그러다가 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다. 원폭 투하 당시, 아니 아시아태평양전쟁을 통틀어 이름 없이 스러지고 그 존재가 잊힌 것은 비단 우리 종조부님만이 아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넋들이 차가운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

생물학적 한계에 갇힌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 역사의 파도 속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간 이들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럼에도 이는 포기할 수 없는 중대한 과업이리라. 다시는 같은 통곡이 세상이 울려퍼지지 않도록, 희미해지는 기억과 역사의 선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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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1972년, 한국의 원폭피해자협회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조선인의 규모를 3만 명으로 발표했다. ⓒ 박광홍

#원자폭탄 #히로시마 #평화 #희생자 #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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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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