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 조장' 69시간제 논란 그 뒤... 더 적게 일할 이유

[주장] 문화로 읽는 노동, 책 <오버타임>을 보고 나서

등록 2023.05.22 15:49수정 2023.05.2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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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유한한 삶의 시간 중 상당한 시간을 노동하는 데 사용한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 속에서 여가를 보내거나 휴식을 취하고, 때로는 더 나은 노동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가 중에서도 노동을 위한 예비적 활동을 하기도 한다.

현재까지 논란이 진행 중인 이른바 '주 69시간제'를 둘러싼 촌극으로 드러난 사실 중 하나는 노동시간이, 노동자의 건강이 의학적 사안을 넘어선 보다 폭넓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안이라는 것이다. 즉 노동시간을 둘러싼 이 싸움에는 '삶'이란 거대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주 69시간제' 논란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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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과 각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 지난 4월 1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주 69시간제 안 폐지 촉구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의 과로사 위험과 작업장 안전사고를 늘어나게 하는 개악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이희훈

 
책 <오버타임(2021년 출간, 출판사 시프)>에는 '팬데믹과 기후위기의 시대, 더 적게 일하는 것이 바꿀 미래'란 부제가 붙어있다. 책은 노동시간을 둘러싼 다양하고 풍부한 담론을 보여준다. 우리의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단지 출퇴근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넘어 가정 내 분업,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진, 생태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책은 우리 스스로도 충분히 인식하기 어려운 그 세상의 연결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싸움이 세상을 바꿀 거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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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타임> 표지 ⓒ YES 24


사회에서 규제하는 '노동시간'은, 언뜻 자연스러워보일지 모르지만 짚어보면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사회적 필요보다는 자본의 이윤을 중심으로 배치 및 조직됐다. 무한한 이윤 추구를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노동 가치를 노동자로부터 추출하려는 경향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여기에 맞서온 조직된 노동운동의 힘과 정치가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주 5일, 싸워서 쟁취한 것 

앞서 노동계의 투쟁이 '주 5일-40시간제'를 현재의 사회적 상식으로 만들어 정착시킨 것이다. 즉 노동시간은 끊임없는 투쟁을 거쳐 변화해온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산물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거저 주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꿔 얘기하면 '사회적 합의'에 따른 노동시간은 힘과 역학관계에 따라 후퇴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를 주 69시간 논란을 마주하며 한 번 더 확인했다.

노동과 노동계급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은 시대이지만 달라지지 않은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소득이 보장된다는 전제가 있다면 그 누구도 지금보다 적게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으리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화폐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는 일터에서의 시간이거나, 일터에서의 지휘·명령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시간이거나 둘 중 하나다. 삶 속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일단 지금의 한국 사회는 '노동보다 자유를, 일보다는 삶을 우위로'라는 항변으로, 69시간을 잠정적으로 저지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혜택이 모두에게 고루 분배될 수 있을까? 젠더 규범은 변수로 어떻게 기능하는가? 일터로부터 줄어든 시간이 곧바로 자유로운 여가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요리나 빨래, 육아 등의 시간을 누가 어떻게 담당하느냐가 여가의, 삶의 시간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여성과 환경,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그 역할을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모성애'라고 불리는, 사랑과 미덕이라는 규범으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내일의 노동을 위해 필요한 회복과 휴식의 준비를 여성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또한 여성의 몫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노동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되어왔다.

가치를 창출한다고 간주되는 '유급 노동'을 위해 필요한 노동을 여성의 역할이라는 이유로 저평가해왔고, 저평가해왔기에 또다시 여성의 몫으로 미뤄온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그렇기에 노동시간 단축이 사회적 평등의 상승으로 연결되려면, 작업장과 일터의 공간을 가정으로 확대하여 고려해야 한다. 책에서 제안하는 바와 같이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이나 새로운 공공 인프라의 구축이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기후위기는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다. 자본주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 요구되어왔던 과도한 생산과 소비, 이를 지탱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과도한 노동은 전 지구적인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해왔다. 그렇기에 적게 일하는 것은 노동과정 일부로 사용되는 자원을 절약할 수 있고, 출퇴근 및 각종 소비에 수반되는 탄소 지출도 줄일 수 있다.

긴 노동시간과 적은 여가로 인해 발생하는 보상적·충동적 소비를 사회적으로 줄여나가는 것은, 현재까지의 자원 낭비와 잘못된 욕구 해소를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창출되는 새로운 여가를 물질적 소비나 사치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요리해 먹거나 지역 사회에서 함께 운동하는 등 건강한 사회적 관계와 활동을 해나가는 형태로, 자본주의적 욕망을 대체할 활동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가 좋아지면 우리 삶도 더 좋아질 것", "지금은 경제가 어려우니 조금 더 참고 견뎌야 한다"라는 말, 그런 부류의 말들을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많이 듣고 자라왔다. 마치 경제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해줄 것이란 전제가 진리인 것처럼 말이다.

서유럽과 북아메리카는 193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사이 1인당 GDP가 네 배 이상 증가했고, 한국 역시 경제 규모가 급격히 성장해왔다. 그러나 사회적 부의 증가가 곧바로 주당 노동시간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다. 인류의 생산성 증대와 노동시간 단축 간 상관관계는 경제적 또는 자연적 법칙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사회적 힘이 증대했을 때 작동한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당연하지만 희미해진 사실, 우리 삶이 윤택해지고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경제 자체의 움직임'보다는 '조직된 노동자들의 실제적 활동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압력'이라는 점을 이 책은 계속 꼬집는다. 우리는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 과정에서 누가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삶의 결정권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그저 경제 흐름에 맡겨서는 안 되고, 노동자가 직접 그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주 69시간 제 논란을 일으킨 노동부의 근로기준법 개정안 입법예고 기간이 4월 17일로 종료됐다. 잠정적으로 저지시킨 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주 40시간제'라는 현 질서를 지키고 개악을 유예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더 적게 일하는 것이 바꿀 수 있는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조직해야 한다. 결국 노동을 바꾸는 것은 우리 삶을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김서룡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5월호에도 실립니다.
#책_오버타임 #노동시간 #노동자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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