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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통계청에 들어가 '조선총독부' 검색 부탁드립니다

[황광우의 역사산책 14] 서훈 못 받은 유공자 여전히 많아... 유족의 애타는 심정 헤아려야

등록 2023.05.23 13:13수정 2023.05.2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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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역사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나는 수감 인원 도표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사진에 담은 도표를 일일이 적었다. 글자가 작아 돋보기로 숫자를 더듬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걸린 연도말 전국 재감자 총수를 보면 어림잡아 총 52만여 명이 일제강점기에 옥고를 치렀다. 눈물이 절로 흘렀다. 찬 겨울, 모포 한 장으로 몸을 싸면서 옥중의 밤을 지낼 때 몰아치는 북풍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4월 봄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철창을 부여잡고 어머니를 부르는 수인(囚人)의 서러움을 아는가?

그런데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 없었다. 52만 명은 너무 많다. 이 숫자가 과연 수감된 독립투사의 숫자일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직접 문의를 하였다.

"며칠 전 역사관에서 수감자 도표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수감된 독립투사의 숫자인가요?"
"아닙니다. 그 숫자는 수감된 조선인 총수입니다."
"수감된 독립투사의 총수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희도 모릅니다. 통계청 사이트에서 조선총독부 자료를 찾으세요."


조선총독부의 자료가 있다니...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바로 통계청 사이트에 들어가 조선총독부를 검색하니 '광복이전통계'가 보였다. 독자들도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들어가자. 국토, 인구, 고용, 물가, 교통, 재정, 무역, 교육 다음에 '범죄·재해'가 보이는가? 눈 딱 감고 누르자. 그러면 감옥이 열릴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단테가 지옥에 방문할 때 베르길리우스의 손을 잡듯, 나의 손을 잡으시라. <신곡>의 지옥 입구를 보면 "여기서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씌어 있다. 그럼 조선총독부 감옥의 입구에 적힌 글귀가 보이는가?

"전향하라. 전향하지 않는 자, 살아 나갈 수 없다."


누르시라. 무엇이 보이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90개가 넘는 방 중 우리가 들어가야 할 방은 어디인가? 나는 왜 이곳에 왔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우리는 '수감된 독립투사의 총수'를 확인하기 위해 왔다. 11번째 방 '범수별 신수형자'로 들어가자. '특별법범'이 보일 것이다. 맞다. 이곳이 시국사범이 투옥된 방이다. 3.1운동 즈음 보안법 위반으로 투옥하였고, 1927년 즈음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하였다.

다음으로 초범, 재범, 3~5범, 6범 이상이 보일 것이다. 1933년, 투옥된 독립투사들 중에서 6범 이상이 212명이란다.

살아생전 백기완 선생이 세 번 감옥 갔다. 박형규 목사가 네 번 감옥 갔다. 문익환 목사는 다섯 번 감옥 갔다. 감옥에 세 번 이상 간 분에겐 영예의 별을 달아 드린다. 백기완 선생은 삼성장군이요, 박형규 목사는 사성장군이요, 문익환 목사는 오성장군이다.

민주화운동관련자들 중에 여섯 번 감옥에 간 분은 매우 드물다. 민청학련의 김병곤 선배가 여섯 번 감옥에 갔다. 그런데 1933년, 여섯 번 이상 투옥된 독립투사가 212명이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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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과청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업무를 총괄한 건물이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자,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의 총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재범 이상은 제외해야 한다. 초범의 수만 뽑아 합하면 그것이 독립투사의 총수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의미가 있는 모든 일은 힘들다. 1910년에서 1943년까지 마흔네 번 반복하여 클릭해야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통계표가 작성된다.
 
1910년 637명, 1911년 610명, 1912년 190명, 1913년 316명, 1914년 707명, 1915년 756명, 1916년 882명, 1917년 1086명, 1918년 1064명, 1919년 6135명, 1921년 2389명, 1922년 1251명, 1923년 1121명, 1924년 1505명, 1925년 1914명, 1926년 2165명, 1927년 2131명, 1928년 2605명, 1929년 1981명, 1930년 2146명, 1931년 2006명, 1932년 1946명, 1933년 1689명, 1934년 1386명, 1935년 994명, 1936년 879명, 1937년 910명, 1938년 842명, 1939년 1314명, 1940년 1574명, 1941년 2630명, 1942년 3582명, 1943년 4026명

: 총계 5만 4662명

이상하게 1920년 통계가 없다. 1919년과 1921년의 중간값으로 보정하자. 1920년 4262명. 1944년과 1945년 통계도 없다. 1944년 통계는 1942년과 1943년의 중간값으로 보정하자. 1944년 3804명. 1945년 통계는 1944년의 절반값으로 보정하면 1945년 1902명.

보정한 세 수치를 합하면 9968명이 된다. 이 값을 총계 5만 4662명에 합하자. 그러면 6만 5337명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이것이다. 이제 서둘러 빠져나가자.

서훈을 받지 못한 유공자, 지금도 너무 많다

건국 이래 2023년 현재까지 서훈한 독립유공자의 총수가 1만 7748명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유공자가 4만 7589명이라는 사실이 제기된다. 문제는 여기까지 오는 데 75년이 걸렸다는 사실이다.

국가보훈처는 유족이 수형 자료를 제출해도, 서훈을 유보한다. '친일흠결'이니 '남조선노동당'이니 까다로운 심사를 하여 유보하고, 마지막엔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서훈을 거부한다.

애가 탄다. 서훈을 받지 못한 4만 7589명이 모두 서훈을 받으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나? 셈하여 보자. 200년이다. 그런데 지금 독립운동가의 유족이 팔십을 넘고 있다.

문학평론가 황광수(1944년생)는 지난 2002년 아버지 황동윤의 서훈을 요청하였다. 황동윤 선생은 1934년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이 넘는 옥고를 치른 분이다. 아들이 제출한 서류가 책 한 권에 가까웠다. 그런데 '해방 후 행적미상'으로 내내 보류판정을 받았다. 2021년 3월 서훈을 받았으나 그해 가을 황광수씨는 눈을 감았다. 대통령이 독립운동가 유족의 애타는 심정을 알까?
#독립유공자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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