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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자기 무덤 구덩이를 판 사람들... CIC와 헌병대의 합작품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1950년 7월 1일 강원도 횡성에서 생긴 일

등록 2023.05.26 17:41수정 2023.05.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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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군 횡성면 곡교리 학살 터 ⓒ 박만순

 
"구덩이 파!" 염라대왕 얼굴을 한 군인 장교가 소나무 숲에 모여 있는 사내들에게 명령했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곡교리 주민들이 집에서 가져온 삽으로 사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가 허리 높이가 되자 군인 장교는 "작업 중지"라고 외쳤다.

이마와 볼, 턱에 비 오듯 땀을 흘리는 이들이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워졌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라는 의아스러운 눈빛을 하고 군인들의 동작에 눈을 고정시켰다. "사격 준비"라는 소리에 구덩이 앞에 서있는 이들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고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웅성거림은 그들이 걸음을 떼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판 구덩이가 '자기의 무덤'으로

웅성거림과 동시에 "탕탕탕" 하는 총성이 지축을 울렸다. 사내들은 볏단 쓰러지듯 구덩이로 쳐박혔다. 자신들이 판 구덩이가 자신의 무덤이 된 것이다. 소나무 숲에 운집해 있던 주민들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충격으로 마치 실어증에 걸린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군인과 경찰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피난시켜 줄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던 이들은 횡성면 곡교리 주민들과 춘천, 홍천, 횡성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보도연맹원들 이었다. 곡교리 주민 중에는 보도연맹원들도 있었다. 군인들은 여성들과 노약자들에게는 "얼릉 피난 가시오"라며 돌려보냈다. 하지만 남자들에게는 자신들과 같이 행동할 것을 주문했다. 유사시에는 군용 트럭으로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줄 것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이들은 구덩이를 파면서도 방공호를 만드는 줄로 여겼다. 자신들이 판 구덩이가 자신들의 '무덤'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다음 열도 구덩이 파!"라는 고함에 얼굴이 굳어진 이들은 쭈뼛쭈뼛 거리면서도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사람들의 운명을 본 이들의 손발은 구름에 떠있는 듯했다. 발로 삽을 제대로 밟지도 못했다. 삽날이 미끄러지기도 하고 흙을 퍼내다가 구덩이에 고꾸라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군인들의 총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구덩이를 다 판 사내들은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구덩이 앞에 세워졌다. 장교의 턱짓에 총성이 우박 쏟아지듯 했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됐다. 총성과 동시에 사내들이 고꾸라지는 모습은 마치 슬로 모션 같았다. 시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어느 누가 자신의 무덤을 신명나게 파겠는가.


시간이 지체되자 군 장교는 나머지 사람들을 곡교리 민가로 이동시켰다. 군인들은 보도연맹원들과 거동이 수상한 민간인들을 박영욱의 집에 감금한 채 문고리에 숟가락을 끼웠다.

동생 찾으러 간 형

"원만이 왔어요?" 헐레벌떡 뛰어온 조원세(당시 35세)는 어머니에게 동생 조원만이 집에 왔는지 물었다. "뭔 소리냐?"라는 모친의 말에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조원세는 부리나케 싸리문을 밀치고 나갔다. 조원만은 보도연맹원이었다. 피난 준비를 하고 있던 조원세의 부인는 남편을 뒤따라 나갔다. 무슨 영문인 줄은 몰랐지만 아들 조종식(당시 8세)도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뜀박질을 했다.

조원세가 몇몇 집의 방문을 벌컥 열었지만 쥐새끼 한 마리 없었다. 몇 시간 전에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피난 갈 것을 지시했기 때문에 민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는 방금 전 곡교리 뒷산 소나무 숲에서 마을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군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마을로 이송시킬 때 뒷줄에 있던 그는 골목길에서 슬쩍 빠졌다. 

조원세가 동생을 찾아 박영욱의 집 싸리문을 밀치는 순간 군인과 맞닥뜨렸다. 군인들은 막 박영욱 집에 가두었던 사람들에게 총질을 한 참이었다. 장교의 지시가 있지는 않았지만 군인들은 조원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뒤따라 온 조원세의 아내는 싸리문 앞에서 쓰러진 남편을 마주했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쓰러진 아버지의 몸 근처에 있는 탄피에서 화약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게 신기했던 조종식은 탄피를 주웠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놈의 자식아. 당장 버리지 못해"라며 고함을 질렀다.

잠시 후 피난가다 총성에 놀라 마을로 돌아온 이들이 박영욱 집으로 몰려들었다. 잠긴 방문을 여니 피냄새가 진동했다. 15~16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천정을 향해 입을 벌리고 누워 있었다. 조종식의 작은 아버지 조원만(당시 32세)도 문턱 쪽에서 목에 총을 맞고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원만을 포함한 보도연맹원들이 즉사했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곡교리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1950년 7월 1일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헌병대에 의해 저질러졌다.(진실화해위원회, 「경기·강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이승만 대통령 만세"

곡교리에서 불과 2km 떨어진 군 비행장에서도 '피의 제전'이 벌어졌다. 강원도 원주군(현 원주시) 소초면 둔둔리 맞은 편에 위치한 원주 군비행장에 보도연맹원 40~50명이 전선줄에 묶여 있었다. 이들은 춘천, 홍천, 횡성, 원주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이었다.

각 지역의 경찰서로부터 인계받은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는 악역은 6사단 헌병대가 맡았다. 헌병대 일등상사(현 상사 계급) 김만식(1927년생)은 보도연맹원을 10명 단위로 줄을 세웠다. "앞 열 우측으로 20보 이동!" 제식훈련이라고는 전혀 받아보지 못한 사내들이 왕방울만한 눈만 굴리자, 헌병들이 총구를 우측으로 내저었다. 그제야 앞줄 사내들이 이동했다.

김만식은 헌병들에게 '앞에 총' 자세를 취하게 하고, 보도연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라"라고 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쳤다.
순간 김만식은 충격을 받았다. 3일 전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이라며 "보도연맹원들을 즉결 처형하라"는 무전이 내려왔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대통령이 자신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는 보도연맹원들은 말 그대로 순진한 민간인들이었다. 김만식은 순간 갈등이 생겼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권총을 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가 내리자 헌병대원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탕탕탕" 하는 소리에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비행장에 흙먼지가 일었다.

총살은 네다섯 차례 반복되었다. 확인 사살은 현장 집행책임자인 김만식의 몫이었다. 그가 든 권총 방아쇠는 시신으로부터 불과 2미터 거리에서 격발됐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김만식의 옷과 얼굴도 피범벅이 되었다. 쓰러져 있는 첫 번째 사내에게 방아쇠를 당길 때에는 온갖 상념이 머리를 휘저었다. 두 번째, 세 번째로 넘어가면서는 방아쇠를 무의식적으로 당겼다.

CIC가 연출, 헌병대는 현장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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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 원주지역 민간인학살 지도 ⓒ 박만순

 

김만식이 춘천과 홍천경찰서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인계받았을 때에는 이미 CIC(육군 특무부대)가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할 자와 살릴 자로 분류한 상태였다. C급은 이미 훈방된 상태였고 처형 대상인 A, B급을 인계받은 것이다.(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중간보고회」, 김만식의 공개 증언, 2007.11.13.)

그가 속한 6사단 헌병대는 춘천과 홍천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이송시켰다. 그러다가 횡성에서 6월 28~29일경 최초 학살을 하고 7월 1일 횡성면 곡교리와 원주 군비행장에서도 학살을 한 것이다. 곡교리 보도연맹원 약 20명은 곡교리에서 3.3km 떨어진 원주군 소초면 의관리 야산에서 학살됐다.(심상학. 1931년생. 원주시 소초면 둔둔리) 

보도연맹사건 최종보고서에 원주군 고네미재(현 원주시 태장2동)에서 곡교리 보도연맹원이 학살되었다고 돼있지만, 이들은 보도연맹원이 아니라 부역혐의자들이었다. 즉, 군경 수복 후인 1950년 9월 말 원주군의 부역혐의자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사건을 전해 듣거나 이후 시신을 목격한 곡교리와 고네미재 인근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그들은 학살이 군경 수복 후인 가을에 벌어졌음을 한결같이 증언한다.

어쨌든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은 강원도 횡성에서 1950년 6월 28~29일경에 벌어졌다. 이후 7월 초까지 횡성과 원주 다수의 장소에서 춘천, 홍천, 횡성, 원주 보도연맹원들이 6사단 헌병대에 의해 집단 죽임을 당했다.

끝나지 않은 트라우마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강원도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으로 피해자로 확인된 이는 불과 3명에 불과했다. 충북 피해자가 약 500명임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수치다. 강원도 서부지역은 6사단 헌병대에 의해, 동부지역은 8사단 헌병대에 의해 최소 수백에서 수천 명이 학살되었을 텐데 말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피해자 유가족들의 전쟁과 국가폭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유독 강원도가 심한 것은 휴전선이 인접한 지역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을 공개 증언한 김만식은 "보도연맹원을 처형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죄가 있고 없고간에 (재판 없이) 민간인들을 처형한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위원회에서였다. 김만식은 공개 증언 전까지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을 깊숙이 안고 살아왔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전쟁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질 날은 언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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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7월 김만식이 충북도청에서 6사단 헌병대의 국민보도연맹원 가해사실을 증언하는 모습. ⓒ 박만순

 
 
#6사단 헌병대 #김만식 #국민보도연맹 #원주 군비행장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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