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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삼일당에서 초대 국무령 취임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42] "국민 전체가 온전히 대동단결의 조직선에서 함께 분투하여야 하겠으며"

등록 2023.06.23 15:37수정 2023.06.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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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항증
 
이상룡은 상하이로 떠나기 전 연락이 가능한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다. 간도참변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통의부→의군부→참의부→정의부 등으로 이합을 거듭하면서 통합된 무장단체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상룡은 60대 중반의 고령으로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해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갈수록 강대해지는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통합 이외의 길이 없다고 역설하였다. 단체의 수장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 2선에서 조정자·중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임시정부 수반의 제의를 받고, 지도자들의 의견을 두루 청취했다. 지지하는 편이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 그리고 이제야 임시정부가 항일무장투쟁의 본산이 될 것을 기대하는 측이 있었다. 

그는 8월 하순 단둥(안동)으로 가서 영국선박 애인호를 타고 서해를 넘어 상하이에 도착했다. 막내 동생 봉희의 장남 광민의 보필을 받았다. 그는 정의부의 민사부 서무과 주임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을축년(1925년) 7월 석주 어른께 상해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으로 부임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내각책임제의 국무령이면 지금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취임식이 9월 며칠인지는 몰라도 상해로 떠나시기는 9월 9일날 떠나셨다.

군정서 회의 후에도 여러 차례 연락이 오고가고 하더니 임정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신 것 같았다. 상해에서도 만주권 독립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활동은 북간도, 서간도를 망라한 만주 일대에서 일찍 시작했고, 그 쌓아 놓은 기반도 무시 못했지.

국무령이면 내각의 총책임자라 정부 최고 높은 자리라고들 했으나, 내게는 항상 시할아버지였을 뿐이었다. 다만 나가나 들어오나 그 어른 앞에선 저절로 고개 숙여지고 엄숙한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주석 3)


대통령 궐위시기 임정을 이끌고 있던 이동녕·이시영·노백린·조상섭·김구 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들과 향후 임정의 운영에 관해 논의하고, 만주 쪽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또 상하이와 임정의 사정도 들었다.

9월 24일 상하이 삼일당에서 초대 국무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국무령 이상룡 취임사

나는 이에 일반 국민의 앞에서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의 자리에 취임하나이다.(…)

이제 경장쇄신을 시작하여 국민 전체가 온전히 대동단결의 조직선에서 함께 분투하여야 하겠으며, 이를 조속히 성취하려면 먼저 그동안 마음을 다해 희생적으로 분투하여 오던 용감한 전사들이 속히 최고기관(대한민국 임시정부) 아래에서 완전히 결합하여 운동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역량을 강대하여야 될 줄 깊이 믿고 이에 힘쓰려 하나이다.(…)(주석 4)

국내의 한 신문도 이를 간략하게 보도했다.

이상룡 씨가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야 일전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 이씨는 지난달 24일 밤에 삼일당에서 취임식이 있었다는 데 최 의장의 사회로써 우렁찬 노래와 식사가 있었다. 하여 방침은 대동단결을 이루어서 민주적으로 조직을 일구고 기초를 공고히 함에 있다고 선언하였다는 바 그 뒤에 만세를 삼창한 후 폐식하였다는데 참관하는 동포도 많이 있어서 근래에 처음 있는 성황이었다더라. (주석 5)

국무령은 명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권력이 부여된 임시정부의 수반이다. 하지만 그는 전임 박은식과 같이 권력이나 명예에 급급한 인물이 아니었다. 취임 당시 67세로 건강도 썩 좋은 편이 못되었다. 여생을 바쳐 임시정부를 발전시키고 이를 동력삼아 조국광복에 초석이 되고자 다짐한다.

국무령 취임 후 약 보름 동안 주변의 인물들과 협의해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0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쳐 이탁·김동삼·오동진·윤세용·현천묵·윤병용·김좌진·조성환·이유필 등 9명을 국무위원으로 발표하였다. 이들 중 이유필을 뺀 나머지 8명이 모두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탁과 김동삼·오동진·운병용은 정의부의 인물이었고, 현천묵과 김좌진·조성환은 신민부의 인물이었으며, 윤세용은 참의부의 인물이었다. 임시정부의 지도층을 만주에서 무장투쟁 경력을 갖춘 인물들로 구성해 군사위주의 최고기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주석 6)


주석
3> 허은, 앞의 책, 138쪽.
4> <독립신문> 호외, <국무령 이상룡 취임식 거행>, 1925년 9월 25일치.
5> <동아일보>, 1925년 10월 2일치.
6> 채영국, 앞의 책, 225~22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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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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