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민족문제연구소
만주 무장독립운동 세력이 조직한 정의부의 내부 사정도 크게 작용했다. 당초의 약속과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원인은 이상룡이 중앙의회 의결사항을 무시하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데서 비롯되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은 임시정부의 두 파견원 오영선과 이유필이 만주에 왔을 때 신민부의 대표들까지 불러 4개의 합의사항을 만들고, 이면으로 임정의 최고 책임자를 정의부에서 추천한 인물로 추대하자는 사항을 제시한 바 있다. 이들의 이러한 제시를 중앙행정위원들이 받아들여 이상룡을 추천하고, 또 이상룡은 행정위원들의 말을 듣고 상해로 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중앙행정위원들은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는 건에 대해서는 중앙의회의 안건에 상정하지 않고 4개의 합의사항만을 의결사항으로 보냈다. 그 결과 중앙의회에서는 4개의 합의사항을 임시정부의 각료를 위원제로 고치는 것과 장차 임정을 만주로 옮기자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중앙의회의 의결대로 임시정부를 만주로 옮길 것이라면 이상룡이 상해로 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주석 8)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이상룡으로서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본인이 원했던 자리가 아니고, 떠밀리다시피 하여 추대된 것인데, 결국 조각이 안 된 것이다. 해서 이듬해 2월 18일 미련없이 국무령을 사임하고 베이징을 거쳐 서간도 호란(呼蘭)으로 돌아왔다.
공은 탄식하기를 "내가 늙은 몸으로 헛된 명예에 몸을 굽히는 것은 절대 내 평소의 바람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 몸을 한 번 움직인 것은 각각의 의견들을 조정해서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그럴 가망이 없으니, 내 어찌 여기에 지체하랴"하고, 국무령직을 버리고 귀로에 올랐다. 북경에서 난리를 만나 이듬해 봄에 호란으로 돌아왔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가을달이 사람 청해 경솔히 문을 나섰다가
봄바람을 짝으로 삼아 집으로 잘 돌아왔네
산도 울고 노하는 시기가 난무하는 판국에서
웃는 낯으로 맞이해 주는 건 너 꽃뿐이로다. (주석 9)
조각에 실패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의정원은 이상룡의 후임으로 양기탁을, 다시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했으나 이들은 부임하지 않았고, 한동안 의정원 의장 최창식이 국무령을 대리했다. 1926년 7월 홍진이 취임했다가 12월 9일 사임하고, 12월 10일 김구가 선출되는 곡절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겨우 정상화되었다.
서간도 무장전쟁론자인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자 초긴장했던 일제는 그가 사임하자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뒤를 쫓았다. 손부 허은 여사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