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사건 당시 봉기군과 토벌군의 첫 전투 현장인 여수 인구부 전투지 모습. 찾는 이도 없고, 안내 팻말 앞에 차량이 세워져 있어 접근조차 어렵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아쉽다.
서부원
작년 이맘때쯤 먼 친인척 중에 여순 사건 당시 좌익으로 몰려 피신한 뒤 행방불명된 이가 있어 유족을 부러 찾아가 특별법의 취지를 설명하고 신고를 권유한 적이 있다. 팔순의 유족은 일언지하 거절했고, 더는 여순 사건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죽임을 당하는 꼴을 봤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가 말한 '세상'은 '권력'을 의미한다. 당시 봉기군과 토벌군이 차례로 도시를 장악하면서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애먼 민중들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그는 14연대 봉기군에 의해 처형당한 친일 지주들과 경찰을 여럿 봤고, 토벌군에 의해 부역자로 몰려 참혹하게 희생된 뒤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는 숱한 주검들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사망자만 최소 1만 1천여 명(당시 전라남도 당국 통계)에 이르는 희생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봉기군과 토벌군 사이의 교전 중 사망한 이들은 많지 않았고, 사건이 진압된 후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토벌군이 학살한 경우가 대다수였다는 건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일부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2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며, 당시의 토벌군은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전장에 투입됐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그들은 '공산 괴뢰 집단'의 야욕을 막아낸 '애국자'로 칭송받게 됐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여순 사건의 희생자들은 반국가세력, 곧 '빨갱이'로 규정됐다. '빨갱이'여서 죽인 게 아니라, '애국자'가 죽였으므로 그들은 '빨갱이'가 되어야만 했던 거다.
여순 사건의 부역자 색출이 마무리되던 그해 12월 1일,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을 본뜬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반공'은 우리 사회의 '국민 윤리'이자 행동 지침이 됐다. '빨갱이'로 낙인찍힌 여순 사건의 유족들은 서슬 퍼런 연좌제의 굴레 속에 출세의 욕망을 접어야 했다. '신원조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헌법상 기본권인 공무담임권조차 제한됐다.
70여 년 동안 연좌제의 고통 속에 침묵을 강요받은 그들이 고작 특별법 하나로 단숨에 닫힌 입이 열리기를 기대할 순 없다. 그들의 입만 쳐다보며 지금껏 지연된 진상규명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단언하건대, 그들의 희생을 몰라서, 그들이 말하지 않아서 여순 사건이 묻힌 게 아니다. 국가가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람들의 기억을 왜곡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에게 보내는 후손들의 '변명'이자 '반성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