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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위에 전깃줄을 달아 두는 도시

[케냐] 나이로비의 현실

등록 2023.08.01 08:06수정 2023.08.0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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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에서 아침 비행기를 타고, 케냐 나이로비에 착륙한 것은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륙에는 처음 발을 딛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케냐에 도착하기 며칠 전, 나이로비 시 외곽에서는 큰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세금 인상안에 대한 반대 시위였죠. 최근의 급격한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 정치권에 대한 비판 여론까지 더해지며 시위는 격화되었습니다. 결국 경찰의 발포로 7명의 사망자가 나왔죠.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현지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며 입국을 결정했습니다. 제가 떠난 다음 날에도 교통 분야에 대규모 파업이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언제나 도시와 도시 사이를 오가야 하는 여행자에게 교통 파업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죠.

그래도 제가 나이로비에 머무는 며칠 동안에는 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시위를 지나고, 다시 또 파업을 앞두고 있는 날들이었지만요. 어떤 의미에서는 나이로비의 혼란 가운데, 잠시 찾아온 휴지기에 제가 다녀간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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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 시내 ⓒ Widerstand


들었던 대로 나이로비는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나이로비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 우간다와 케냐를 잇는 철도의 기지로 만들어진 신도시입니다. 나이로비가 몸바사 대신 수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도 이제 갓 100년을 넘긴 정도죠.

새로 만들어진 도시답게, 나이로비는 일부러 기후가 적절한 고산 지대에 조성되었습니다. 덕분에 적도 근처의 도시인데도 크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남반구는 지금 겨울이지만, 나이로비는 여름에도 큰 차이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케냐는 동아프리카 최대의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입니다. 인구나 영토 면에서는 탄자니아나 콩고민주공화국이 더 큰 국가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케냐가 단연 앞서 나가는 국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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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 시내 ⓒ Widerstand


나이로비는 앞으로 더 큰 도시가 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동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 중 하나거든요. 게다가 동아프리카 국가들은 '동아프리카 연방'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동아프리카 연방'은 이미 헌법 초안을 만들고 구체적인 구성 논의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물론 여전히 걸림돌은 많죠. 각국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EU와 같은 국가 연합의 형태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형태든 이 연방이 구성된다면, 아프리카 최대의 국가를 꾸리게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이미 이런 형태의 경제적 통합을 이룬 지역들이 있습니다. 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서아프리카나 중앙아프리카 지역이 그렇죠. 서아프리카의 8개 국가는 '서아프리카 CFA 프랑'이라는 동일한 화폐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앙아프리카에서도 6개 국가가 '중앙아프리카 CFA 프랑'이라는 화폐를 함께 사용하고 있죠. 아프리카의 통합은 이미 현실입니다.

하지만 동아프리카에 하나의 국가나 국가 연합이 출범하게 된다면, 그 영향력은 보다 클 것입니다. 최근 콩고민주공화국까지 동아프리카 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영토나 인구가 크게 확장되기도 했고요. 연방이 출범하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국가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연방의 경제적 중심지가 될 나이로비도 더 부유한 도시로 성장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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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의 쇼핑몰 ⓒ Widerstand


사실 굳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이로비 시내의 높게 솟은 빌딩과, 화려한 쇼핑몰은 흔히 아프리카라고 하면 생각하는 편견과는 분명히 다른 도시였으니까요. 생각해보면 동아프리카의 다른 국가에서는 흔하다는 정전을 나이로비에서는 한 번도 겪지 않았습니다.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 가운데는, 주변의 다른 국가에서 넘어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야 휴양지인 잔지바르에서 왔으니 잘 모르지만, 다른 분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케냐에 입국하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요. 관광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부터 인프라까지 많은 것들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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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 국립박물관 ⓒ Widerstand


하지만 이것만이 나이로비의 현실은 아닐 것입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도, 도시에는 분명한 빈부의 격차가 느껴졌습니다. 동네마다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감돌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는 대충 얽은 판잣집이 있었고, 다리 밑에는 천 하나를 두르고 잠을 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면 어느 한 쪽에는 화려한 정원을 갖춘 집과 호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죠. 그런 집들은 물론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제가 묵었던 숙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숙소에는 언제나 경비가 지키고 서 있었죠. 담장 위에는 전깃줄을 달아 두었습니다. 담을 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죠. 주변의 대부분 건물이 그랬습니다. 전기 담장을 치는 도시의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 봤지만,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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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흐르는 담장 ⓒ Widerstand


케냐를 떠나는 날, 공항에는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당장 다음날부터 대규모 파업이 예고된 상태였으니, 물론 파업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죠. 경찰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강경히 대처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여행자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고 싶고, 어떤 혼란이 있더라도 옳은 길을 찾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여행하는 나라는 혼란 없이 평안하길 바랄 때가 있습니다.

케냐를 떠나는 날이 그랬습니다. 새벽 공항에 앉아 뉴스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어제까지 이 도시가 평안하기를, 어떻게든 파업과 시위가 잦아들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떠나는 사람이 된 저는 경찰의 폭력 진압 선언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나이로비에 하루를 더 머물렀다면, 경찰의 강경한 진압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혹여 그것에 안심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당장 제가 떠난 다음, 나이로비에서는 경찰의 폭력으로 12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제가 나이로비에 있었다면, 그 소식을 어떤 마음으로 접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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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강경 진압 방침을 알리는 뉴스 ⓒ Widerstand

 
나이로비 여행은 짧았습니다. 그 흔하다는 사파리 구경도 안 해 봤습니다. 그저 빌딩들이 들어선 나이로비의 시내만을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이 도시의 현재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재마저 모두에게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너무도 다른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행자인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나이로비에 입국하던 저와, 나이로비를 떠날 때의 저는 아주 다른 위치에 선 사람 같았습니다. 파업과 시위, 경찰의 진압을 바라보는 시각조차 너무도 달라졌으니까요.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입니다. 케냐가 속한 동아프리카만 해도 충분히 큽니다. 그러니 어느 공익광고에 흔히 나오는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으로도, 화려한 불을 켠 고층 빌딩의 모습으로도, 아프리카를 단번에 설명할 수는 없겠죠. 나이로비 역시 그렇습니다.

다만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생각합니다. 전기가 흐르는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올 때면, 긴장을 풀고 안도하던 저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손쉽게 평화와 진보를 말하던 제게는, 그 간극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세계여행 #케냐 #나이로비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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