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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쏟아진, 청소 노동 언니들의 '하늘 보기 운동'

[솔라시 포럼] 문화연대 활동가의 호호 체육관 분투기

등록 2023.09.20 12:54수정 2023.09.2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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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대는 안녕할까? 노동과 시민사회의 더 깊고 넓은 연대의 조건을 만들려는 노동·시민사회연대포럼, 솔라시(Solidarity of Labor and Civic society) 조직위원회는 노동,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연대 경험과 사회적 의미를 다루는 글을 몇 차례에 나눠 싣는다. [기자말]
2020년 6월,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병폐에 맞서 싸운 선수가 있었다. 선수단 내의 폭력과 차별, 일상적인 반인권적 행태에 항의했다. 내부 항의로 해결되지 않자, 대한체육회와 경찰에도 호소했다.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을 줄은 몰랐다. 억울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폭력 가해자를 처벌해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고(故) 최숙현 선수 이야기다.

그녀의 죽음 뒤에야 조금의 반향이 일었다. 뜻있는 시민단체와 체육계, 인권 단체가 힘을 모아 최숙현의 뒤를 이었다. 반복되는 체육계의 폭력에 문제제기하고 철옹성 같은 체육계 권력 집단과 싸움을 시작했다. 스포츠 혁신위원회를 만들고 10대 핵심 과제를 선정하고 권고안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스포츠가 나아가야 할 미래와 대안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럿이 모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시민사회 활동가에게 패배처럼 익숙한 것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오랜 경험 속에서 체득했다. 우리도 그랬다. 체육계의 카르텔을 분쇄하는 것에는 '아직' 실패했지만, 우리가 잘하는 방식으로 다시 싸움을 걸어보기로 했다. 스포츠가 원래 시민의 것이라는 점, 스포츠 인권과 스포츠 정책 역시 민주주의와 인권, 공정과 평등, 다양성과 같은 민주적 보편 가치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을 시민에게 알려 나가는 것이다. 아니, 더 공세적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것은 스포츠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프로젝트다.

하하 호호 웃으며 즐기는 스포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체력을 스포츠를 통해 불어 넣어 준다는 구상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청소노동자는 몸도 많이 쓰고 노동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지만, 정작 자기 몸은 돌보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자기 몸을 위한 시간을 함께 만드는 것, 내 자신을 위해 노동할 힘을 키우는 활동을 스포츠로 해볼 수는 없을까? 그렇게 호호 체육관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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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체육관에서 진행된 호호체육관 요가수업 ⓒ 이두찬

 
후보를 찾다 포착된 것이 서강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청소노동자가 무슨 스포츠야?'라는 반응은 다른 누구도 아닌 청소노동자에게서 먼저 나왔다. 포기하지 않고 요가부터 시작했다. 조금 친해지자 호칭부터 정리했다. 그동안 아줌마, 어머니, 여사님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지만, 우리끼리는 깔끔하게 '언니'로 통일했다.

매주 목표일 40분 간 진행된 요가수업은 갈수록 재미가 붙었다. 언니들은 매번 예정 시간 전부터 와서 예습과 복습을 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하듯, "올라가지 않던 어깨가 올라간다", "일을 할 때 어떻게 하면 몸이 덜 피곤한지 생각하면서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언니들은 이제 운동(스포츠)이 왜 필요한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제야 본격적인 호호 체육관이 열렸다.

하늘을 보는 운동, 배구로 다져진 연대


그런데, 무슨 스포츠를 할지는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언니들은 요가보다 몸을 좀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평소 땅만 보고 청소를 하니 하늘을 보는 운동이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하늘을 보는 운동, 배구다.

그래도 쉽게 배구를 하려고 할까? 라는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10명이나 되는 언니들이 선뜻 '선수'가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배구 연습 자체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제대로 가는 공이 거의 없었고, 조금만 연습해도 금세 지쳤다. 그래도 하하 호호 웃음소리만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도 늘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바로 서강대 학생들이었다. 자신들이 운동하던 공간을 청소만 하던 언니들이 배구를 하고 있으니 신기해했다. 그러다 인권동아리 학생들은 아예 호호체육관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했다. 어느새 호호 체육관은 시민단체와 노동자, 학생들이 함께 하는 거대한 연대의 장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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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청소노동자 언니들이 웃으며 배구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윤성희

 
한 학기가 지날 즈음, 우리는 호호 체육관 프로젝트를 한번 매듭 짓는 조촐한 '졸업식'을 개최했다. 졸업식에서 언니들과 활동가들, 서강대 학생들이 편을 나눠 제대로 된 배구 경기를 진행했다. 물론 규칙은 우리가 정했다. 토론을 통해 서브 실수 한번은 넘어가기, 바닥에 한 번 튕겨도 계속하기 등 우리 수준에 맞는 규칙을 짰다.

나름의 치열한 경기였지만, 아무도 승패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우리는 배구공을 서로 주고받듯,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서로가 돕는 연대란 것을 하고 있었다. 스포츠가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스포츠를 통해 우리는 이미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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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청소노동자들과 노고지리 학생들이 함께 배구경기를 하고 있다. ⓒ 윤성희

 
스포츠로 세상도 바꿀 수 있을까?

언니들은 운동을 하며 무엇을 얻었을까? 언니들은 학생보다 일찍 출근해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한다. 우리가 교정을 걸으며 학교가 왜 이렇게 깨끗한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 노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상쾌한 일상을 선물하는 언니들이 일주일에 하루 한 시간 남짓 자신들이 청소하던 공간을 점유해 당당히 그 곳에 서게 만들었다.

또 매일 바닥을 쓸고 닦으며 하늘을 볼 시간도 없었던 언니들에게 하늘을 보고 움츠린 몸을 잠시라도 펼 수 있게 만들어줬다. 드라마틱하게 삶이 변화하진 않겠지만, 티비에서만 보던 운동을 자신도 했다는 경험이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을 위한 작은 발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도 물론 얻은 것이 많다. 가장 크게는 노동자들에게 운동(스포츠)이 큰 활력소가 된다는 것을 눈으로 몸으로 확인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1기 호호체육관 청소노동자들은 요가 수업을 통해 몸의 현실을 자각하고 몸을 잘 사용하는 법과 자기 기술의 익혔다. 달라지는 몸을 인식하고 운동의 즐거움을 느끼고 이 즐거움을 동료들과 공유하고자 하였다. 호호 체육관은 생활체육, 여성 스포츠, 노동자의 문화 운동과 여가에서도 소외되었던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자신을 위해 청소(노동)할 힘을 얻는 노동자를 위한 문화충전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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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체육관에서 진행된 배구수업 졸업식. 배구경기를 끝내고 서강대 청소노동자 언니들과 노고지리 학생들, 문화연대 활동가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윤성희

 
우리는 더 많은 호호 체육관을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더 많은 노동자와 함께 건강권과 운동할 권리를 외치고, 동시에 그동안 엘리트 스포츠 육성 중심의 시스템에 가려져 있던 스포츠할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바꾸려 한다. 최숙현 선수의 안타까운 죽음에서 시작된 호호 체육관은 이처럼 느리지만, 저변에서부터 근본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 가고 있다.

언니들의 운동도, 우리의 운동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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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청소노동자들과 서강대 노고지리 학생들의 배구수업 ⓒ 윤성희

 

* 이두찬 기자는 '호호 체육관' 프로젝트를 진행한 '문화연대' 활동가입니다.
덧붙이는 글 노동과 시민사회의 정례적 연대 문화를 만들기 위한 솔라시 포럼이 9월 21일(목)부터 23일(토)까지 충남 한국문화연수원에서 개최됩니다. 솔라시 포럼 보기 www.bit.ly/솔라시
#호호체육관 #솔라시포럼 #청소노동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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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을 돕는 좋은 세상이 있다는 꼬드김에 넘어가 여전히 불온하고 위험한 상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행하기엔 비루한 몸뚱아리를 가진 먹보요 술꾼이며, 약하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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