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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차'에 분개한 남자들이여, 이 장면을 보라

[주장] 핑계고 '유아차' 자막 논란과 편의점 알바생 폭행 사건... 당신이 진짜 분노해야 할 것은

등록 2023.11.11 11:35수정 2023.11.1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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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유튜브 ‘뜬뜬 DdeunDdeun’에 올라온 ‘핑계고’ 영상. ‘유모차’라는 말이 자막에는 ‘유아차’로 대체됐다. ⓒ 유튜브 ‘뜬뜬 DdeunDdeun’

 
잠잠하다 싶더니 또 나타났다.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다. 두더지처럼 땅속을 떠돌다 불쑥 고개를 내밀고는 이번엔 '유아차'라는 단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당신은 잔뜩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려워하고 있다. 분노는 위기 상황에서 느끼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당신에게 닥친 위기 상황은 바로 시대의 변화다. 그것도 여성들이 앞장서서 주도하는.

지난 3일 웹 예능 '핑계고'는 배우 박보영, 방송인 유재석과 조세호 출연분을 공개했다. 이후 남초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영상 속 '유아차'라는 자막에 불만을 제기하는 글이 확산했다. 조카들과 놀이공원에 놀러 간 이야기에서 '유모차'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왔는데, 자막에는 '유아차'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박보영, 유재석, 조세호 중 그 누구도 '유아차'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제작진 마음대로 바꿨느냐는 것이다.

제작진이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며 '유아차'로 수정한 이유는 세상 무해하게 들리는 '유모차'라는 단어에 성차별적 의식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모차는 어린아이를 태워서 밀고 다니는 수레를 뜻한다. 그런데 유모차를 미는 사람이 꼭 어머니만은 아니다. 아버지나, 조부모 혹은 다른 보호자가 사용할 수도 있는데, 굳이 '어미 모(母)' 자를 쓰는 것은 육아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한정 짓는다.

'유모차' 대신 '유아차'를 쓰자는 움직임은 어제오늘 일지 않았다. 2018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성평등 언어사전을 발표하며 미는 사람이 아닌 타고 있는 아이를 주체로 하는 '유아차'로 부를 것을 권장했다. 서울시인권위원회도 같은 이유로 '유아차'를 순화 용어로 권고했다.

'혹시 페미?'... 유구한 마녀사냥의 역사 

이들의 심기를 거스른 건 비단 유아차라는 단어 자체가 아니다. 사회 곳곳에 '페미'가 침투해 '페미 사상'을 퍼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페미니스트 제작진의 방송 검열", "유아차라는 말 쓰는 여자만 걸러도 결혼 반쯤 성공"이라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정치인이 시위하는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만들 듯, 페미니스트를 '페미나치'에 비유하며 마땅히 척결해야 할 세력으로 몰아갔다.

페미 낙인에서 페미 색출로 이어지는 21세기 마녀사냥은 절찬리 진행 중이다. 온라인 게임 '클로저스'의 김자연 성우는 트위터에 사진 한 장을 업로드했는데, 이후 '남혐 논란'에 휩싸이며 녹음한 음성이 삭제되고 말았다. 사진 속 티셔츠에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자는 왕자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에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교체된 일러스트 작가 6명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콘텐츠 불공정 행위로 신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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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된 GS25 포스터(왼쪽)는 결국 교체됐다. ⓒ GS25

 
GS25는 엄지와 검지로 소시지를 집는 일러스트가 포함된 행사 포스터를 공개했는데, 손가락 모양이 메갈리아의 로고와 유사하며 소시지는 남성의 작은 성기를 은유한다는 억측에 시달렸다. 결국 해당 포스터를 담당한 디자이너는 "저는 아들, 남편 있는 워킹맘으로 남성 혐오와 거리가 아주 멀고, 손의 이미지가 메갈이나 페미를 뜻하는 표식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라고 해명해야 했다.


페미니즘과 관련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든 의견과 사소한 행동까지도 '페미'로 몰아 온라인에서 신상을 털고 조리돌림을 하며 모독의 강도를 높여나가고 있다. 방송인 재재는 백상예술대상 레드카펫에서 엄지와 검지로 초콜릿을 꺼내 먹는 퍼포먼스를 했다가 남자의 작은 성기를 비하하는 포즈를 취했다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돼 네티즌의 뭇매를 맞았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진심으로 남녀평등을 바란다. 그런데 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가?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저서 <한국, 남자>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남자들이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남자가 피해자다'라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군대에도 가야 하고, 데이트 비용도 내야 하고, 결혼하고 나면 돈 벌어 오는 기계가 되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자들은 좋아진 세상에서 의무는 다하지 않고(군대를 가지 않고) 권리만 요구하며, 남자들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페미니즘이나 메갈리아가 등장해서 성차별과 여성 혐오를 지적하는 것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자들이 나를 존중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로서 나의 '권리'인 것이다.
 
당신은 기만자가 아니다. 스스로 자기 연민과 정당성을 부여하며 당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을 뿐이다. 황당한 음모론을 퍼트려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고 해서 당신의 비상식적인 주장이 그에 걸맞은 가치가 있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단지 머릿수가 많고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많은 언론은 스피커를 자처했다. 무엇을 싣고 싣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음지에서 유통되는 발언을 양지로 끌고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갑자기 팔자에 없던 관심을 받아 한껏 들뜬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언론도 덩달아 주목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신의 전략은 통했다. 온라인상에서의 집요한 공격은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로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응해준 결과를 보라. 게임 업계 여성들이 부당 해고를 당했고, GS25를 비롯한 많은 기업이 사과문을 올리며 관련 조치를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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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0대 남성이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편의점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행 당시 편의점 내부 폐쇄회로(CC)TV 화면 캡쳐. ⓒ 연합뉴스 = 독자 제공

 
허튼 곳에 시선을 뺏긴 사이, 혐오는 소리 없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핑계고'가 '싫어요' 테러를 받은 다음 날(4일),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선 20대 남성이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남성은 "머리가 짧은 걸 보니 페미니스트다. 나는 남성연대인데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며 아르바이트하던 여성과 폭행을 말리던 행인을 여러 차례 가격했다. '유아차'에 분노하는 당신에게 똑똑히 묻고 싶다. 유아차와 무차별 구타. 진짜 분노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유아차 #유모차 #페미니즘 #여성혐오 #젠더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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