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숙 공공운수노조 서울도시가스 분회장이 계량기를 점검하고 있다.
김윤숙
처음 가스점검원 일을 시작한 건 IMF위기가 끝나고 나서였다. 남편이 건설쪽 종사자로, IMF위기 때 아예 일을 중단해야 했다. 언제든 누구든 쉽게 말하는 "할 게 없으면 '노가다'나 하지"조차도 통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어서 파산 신청을 하고,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가 IMF위기가 끝나고 작은 분식집을 차려서 3년 정도 운영했다. 작은 가게였는데 줄 서서 먹을 정도였지만 이마저도 대형 분식 프랜차이즈가 주변에 생겨서 그만뒀다. 그때 자주 오던 손님 중 하나가 '가스점검원'이었는데 "내가 하던 일을 해볼래요?" 하기에 관심을 갖고,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손님이 지나가듯 던진 그 한마디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18년 동안 내 '직업'이다. '나도 경제활동 하는 직장인'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내가 했던 가사노동도 물론 힘들었지만 이를 잘 모르는 가족들은 집 밖에서의 노동을 더욱 높게 사기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점검을 다니다 보면 정말 가스가 새는 집이 있다. 그럼 '내가 고객의 생명을 구했다'는 생각이 들기에 뿌듯할 때도 있다.
그런 순간이 아니고서야 힘든 때가 훨씬 많은 일이다. 날씨, 업무량, 그리고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 고객들의 하대, 계단 낙상 사고, 개 물림 사고. 이것뿐일까. 송달도 하다 보면 어깨도 아프고, 비 오면 미끄러지기 일쑤고, 납부 기한이 있는 고지서는 빨리 전달해야 하니 시간에 쫓긴다. 이렇게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강박도 생겼다.
오늘 안 가도 내일은 가야 하는 점검원들
'신입' 딱지를 막 떼고 나서였을까? 점검을 늦게까지 하다 보니 오후 9시에 방문해 점검한 일이 있었다. 고령의 고객이 "지금 잘 시간인데 왜 벨을 눌렀느냐" 하고 호통을 쳐 눈물 쏙 빼고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8~9년차였던가. 한 번은 고객이 알몸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현관문이 열린 집이었고, 이미 밖에서 계량기 점검은 마쳤고, 안방까지 보이던 상황이어서 들어가서 가스레인지만 보고 나오면 업무가 끝이었다. 일이 금방 끝나겠다는 기대감에 바로 집 안을 향해 "가스점검 왔어요. 보일러는 밖에 있어서 점검했으니 가스레인지만 보고 갈게요" 하고 말했다.
아무 대답이 없어 다시 한 번 "고객님 저 들어가도 돼요?"하고 들어갔더니, 30대 건장한 남성이 저벅저벅 알몸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그냥 문 밖에 돌처럼 굳은 채로 멈춰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그는 "가스점검 안 받아!"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들어간 게 아니라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한 번은 업무용 휴대전화로 점검 일정을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파자마 입은 자기의 가랑이 사진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당황스러운 사진을 받고서 침착할 수 없는 상황에도, 일반 기업처럼 이런 일이 있다고 점검을 안 할 수가 없는 직업의 특성상 방문을 해야만 한다. 오늘 안 간다면 내일 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방문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의 보호를 받고 싶어 우선 해당 가구 근처 지구대에 방문했다. 경찰에게 내가 받은 그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물었더니, 경찰조차도 그 가구에 나 혼자 방문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며, 방문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바로 관리자에게 전화하여 자초지종을 말했고, 나는 결국 두려움에 방문하지 않았다.
"당신의 가족이어도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관할 구역에 새 계량기가 생기면 업무용 휴대전화에 자동으로 뜨게 돼 있는데, 새로 생성된 것 하나가 내 기기에 뜨기에 방문했다. 관리자가 문을 열어야 하는 곳이었는데, 빌딩 주인인지 관리인인지 모를 50대 후반 남성이 "계량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단말기에 뜨면 점검을 해야 하기에 다시 정중히 요청드렸다. 그때 그가 말했다.
"계량기가 없으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박박 기어".
그 고객의 단호함에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 후미진 뒤쪽으로 단 둘이 들어가서 계량기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런 고객과 함께 가야 하는 것도 무서웠다. 그렇지만 지금 안 가더라도 나는 내일이든 모레든 와서 점검을 하니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 돌아서 보일러실에 들어가니 계량기가 떡하니 있었다. 그때서야 그가 "이게 왜 여기에 있지?"라고 했다. 설치만 해두고, 사용하지 않는 계량기였던 모양이다.
고객의 폭언에 대한 억울함, 방금 전 느꼈던 두려움을 담아 겨우 한마디 했다. "고객님 아내가 저와 같은 일을 한다 해도 이렇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이다. 당한 것에 비하면 너무 약한 대처라 여길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 건물에 가야 하는데 내가 고객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당했다 한들 고객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까?
위험해도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