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을 위해선 의심의 눈초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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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운전자는 상대 운전자를 모른다. 쉽게 상대를 믿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조심이다. 물론 부주의한 사람도 있기에 사고가 나지만 웬만해서는 끼어들다가도 '부딪힐까 봐' 멈추고, 끼어주지 않으려다가도 '부딪힐까 봐' 속도를 줄이게 된다. 그렇게 블럭을 끼워 맞추듯 차량이 배치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긴다.
이것도 일종의 믿음이라고 볼 수 있긴 하다.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믿음. '난 너를 믿지 않겠다'는 다짐. 이런 불신의 믿음과 다짐 속에서 안전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상대 운전자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깜박이다. "비켜! 나 이리로 갈 거야!", "제가 이쪽으로 가려고 하니 조심하세요." 그 태도가 어떻든 상대가 대응할 여지를 만들어 준다.
의도적으로 켜지 않는다면 작동하지 않기에 브레이크 다음으로 가장 확실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의도를 내비춘다고 항상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우리는 조율하며 나아갈 수 있다.
사람 간에도 운전할 때와 같은 불신의 믿음과 깜빡이가 필요하다. 우리는 대부분 타인을 알지 못한다. 평소 친하게 지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시시각각 변하는 기분이나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일일이 알아내거나 헤아릴 수 없다. 안다고 해도 실상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가족 간에도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해 다툼이 일기도 하는데 하물며 남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그러니 '부딪힐까 봐'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사람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자동차 간의 사고에서는 보험이 존재한다. 대리자가 있고 조율도 가능하다. 반면에 사람 간의 사고에서는 보험같은 매개체가 없다. 사고 수습이 쉽지 않다.
사람 간의 사고는 보상이나 수리를 통해 회복되지 않는다. 증오라든가 절교라든가 하는, 해결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결과만 남는다.
내 생각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오랜 고민 끝에 내 뱉은 말이 상대에겐 깜빡이 없이 치고 들어온 위협일 수 있다. 놀람에 가슴을 졸인 상대의 경적 같은 경고성 발언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말에도 필요한 눈치
자동차 운전처럼 깜빡이를 켜서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다. 끼어들어도 되는지 잠시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이번엔 그냥 지나가게 둬야하는지를 깜빡이를 켜고 살펴야 한다.
말에 있어 깜빡이는 별다른 게 아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자꾸 지적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여기서 이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나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누군가는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선 뱉고 보면, "왜 자꾸 짜증이냐?", "매번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야?", "야야, 괜찮아. 나 때는..." 이런 말을 쏟아내며 무턱대고 머리부터 디미는 것보다 훨씬 상황은 부드럽게 흘러간다.
물론 깜빡이를 켠다고 항상 무탈한 것은 아니다. 차선을 변경하고자 하는 사람은, 뒤차를 유심히 보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속도로 차선을 변경해야 한다.
깜박이를 켠다. 뒤차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상대의 속도가 줄어들면 재빠르게 차선을 변경하고 속도가 빨라지면 다음 기회를 노린다. 껴줄 눈치가 아니면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깜빡이 켜고 일방적으로 진입하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보복을 원하지 않는다면 자중할 필요가 있다. 깜빡이를 켜고 무조건 차선을 변경하지 않는 것과 같이 눈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알다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말하지 않았나.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현명한 것이라고. 그러니 좀 현명해져도 괜찮다. 운전에서나 말에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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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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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들이밀기 금지, 말에도 깜빡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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