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과 역행의 시대, 우리는 돌파한다

젠더 관점에서 본 2023년,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 여성들

등록 2024.01.23 15:54수정 2024.01.2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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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한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젠더 관점으로 2023년을 정리 중이라며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질문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2023년을 한마디로 정리하면?'이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 즉시로 '퇴행과 역행의 시대'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이 모두 무너졌다. 주택가 등산로도 지하철역도 친구들과 즐겁게 다니던 거리도 모두 공포가 드리운 공간이 되었다.

여성노동자들을 지켜주던 인프라도 위기를 맞았다. 고용평등상담실이,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가, 성폭력상담소가, 가정폭력상담소가 예산 삭감으로 사라지거나 축소되거나 통폐합 위기에 처했다.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을 위해 힘들게 만들어낸 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그대로 사장되고 있다. 

몇 년간 투쟁해 온 간호법이, 노조법이 겨우 국회를 통과했으나 스러져갔다. 안전하고 평등한 정의로운 일터를 만들어야 하는 국가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의 고착, 장시간 노동을 확대하려는 움직임만 가득하다. 돌봄노동에 대한 인정이 세계적 흐름이지만 돌봄노동자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다. 돌봄노동자의 적정임금과 안정적 고용을 겨우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서비스원에 대해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받아간다'며 무차별 예산삭감을 단행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에 대한 통제는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이 모두가 2023년에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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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진행된 「정부가 삭제하고 파괴한 성평등, 국회가 살려야 한다」 기자회견 ⓒ 한국여성노동자회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여성혐오에 대한 발화가 구체적 현실 폭력의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게임유저들이 벌이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심각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11월, 게임회사 넥슨의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 애니메이션에서 단 0.1초 지나간 캐릭터의 집게 손가락 모양을 일부 유저들이 문제삼기 시작했다. 그 즉시 원청인 넥슨, 하청업체인 뿌리의 사과로 이어지며 사건은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다. 여성, 노동단체들은 이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조직하였다. 기자회견 계획이 밝혀지자 온라인 상에서는 기자회견장에서 칼부림을 하겠다는 예고가 수차례 올라왔다. 경찰에서 먼저 신변보호를 하겠다 말했다. 기자회견장은 기자회견 당사자보다 경찰과 기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로 가득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자 주도한 여성단체로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스스로 안전을 위한 자구책을 준비해야만 했고,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해야만 했다. 공동주최를 했던 다른 단위에는 협박전화가 없었다. 오로지 여성단체만을 겨냥한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였다.

폭력과 혐오가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눈덩이처럼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 온라인상의 혐오 발화는 익숙하다. 댓글로 달리는 무수한 욕설과 인신공격은 익숙해지기 힘들지만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에게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직접적으로 신변을 위협하는 오프라인 협박까지로 진행된 것이다. 

온라인 무뢰배들의 여성혐오가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은 지난 대선 이후이다. 그 전까지 온라인에서 일부 집단의 사이버불링으로 존재했던 여성혐오가 적극적인 정책이자 선전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것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로 시작된 현 정부의 정책화된 여성혐오는 사회적으로 '그래도 괜찮아'라는 시그널을 주었다. 이 시그널은 광범위한 페미니즘 백래시와 여성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신당역 사건도, 인하대 사건도 여성혐오 범죄라는 사건의 본질을 여성가족부 장관의 입으로 앞장서 부인했다. 성평등 실현에 앞장서야 할 여성가족부가, 약자에 대한 권리보장과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가 피해자들 앞에서 왜곡되고 편향된 여성혐오를 외치는 자들을 옹호하고 있다. 급기야 '숏커트라서 페미니스트이니 맞아야 한다'는 현실 폭력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일면식도 없었던 편의점 여성노동자에게 가해진 갑작스런 폭력은 일상으로 깊숙이 파고든 현실에서 마주한 소름끼치는 여성혐오 범죄였다. 

이 모든 사건들 뒤에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위치성이 존재한다. 페미니즘 사상검증의 타겟이 되는 이들은 프리랜서이거나 하청 직원들이다. 원하청 위계, 비틀린 고용형태의 하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자들이 손쉬운 피해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작업 과정상 개인이 의도적으로 혐오 표현을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 여성노동자가 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협박을 멈추지 않는다. 원청은 노동자를 보호해 주지 않고 적극적으로 혐오에 협조한다. 심지어 면접 과정에서 직접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는 이 모든 사건들에 침묵하고 있다. 남성들이 함께 있는 단체에는 가지 않는 협박전화가 여성단체에는 걸려온다. 여성은 산책을 하다가도, 일터에서 일을 하다가도 너무나도 손쉽게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폭력이 심해지면 저항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다짐은 지금도 지속적인 실천과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적 경험에서 체득한 것은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은 폭력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싸우고 있다. 편의점 폭행 피해자는 여성혐오범죄 강력 처벌 탄원서 연명을 받고 있다. 원청업체의 압박에 시달렸던 하청업체는 여성노동자를 보호하겠다고 결정하고, 악성유저들을 일제히 고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성게임유저들은 넥슨에 대한 불매를 선언했다. 폭력과 협박의 대상이 된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주눅들지 않는다. 더욱 더 큰 목소리로 연대하고 돌파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2월호 '女性여성女聲'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여성 #돌봄노동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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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비정규 노동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노동시민사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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