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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10 총선1277화

[총선르포] "특별법도 거부한 윤 대통령, 이태원 유족에겐 나라가 없어요"

이태원참사 골목 찾은 시민들 "진상규명 반대한 무능한 정부"...유가족 '생명안전 3대과제' 발표

등록 2024.03.27 13:30수정 2024.03.2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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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를 찾은 한 추모객이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 ⓒ 복건우

 
"아무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고 있다. 참사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총선이 돼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이태원 골목, 그리고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만난 시민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사 발생 500일(3월 11일)을 훌쩍 넘긴, 그리고 총선을 보름 정도 앞둔 지금, <오마이뉴스>가 찾은 두 현장엔 정부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100일, 200일, 300일, 400일, 500일... 지연되는 약속과 길어지는 싸움은 숫자로 누적됐다. 유가족들이 목소리를 모아도 참사 책임자 누구도 피해자가 납득할 만한 사과를 내놓지 않았고,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은 진상규명특별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처음으로 맞는 총선 결과가 참사 후 분기점이 될 수 있을까. 지난 14일~25일까지 서울 중구 서울광장 분향소와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를 찾아 유가족과 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서울광장 분향소 추모객들 "특별법 거부 옳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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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 앞에서 이성기씨(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동민씨 아버지)가 분향소 주변에 걸려 바람에 날리는 깃발들을 정리하고 있다. ⓒ 복건우

 
14일 오전 10시부터 이성기(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동민씨 아버지)씨는 청소기를 들고 분향소 주변에 떨어진 낙엽을 쓸었다. 닷새 전 서울광장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500일 추모문화제'가 끝나고 분향소는 다시 한적해졌다. 이씨는 매일 아침 이곳에 나와 희생자들의 영정을 지키고 있다. 왼쪽 가슴에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라고 적힌 보라색 점퍼를 입은 차림이었다.

"아들 떠나보내고 분향소 차려지고 나서는 매일 나오지. 성남에서 서울광장까지 넉넉잡아 2시간 정도. 빨리 나오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4~5시까지 있고, 어떨 땐 7시까지 있기도 하고. 아이들 영정에 쌓인 먼지 털어내고, 분향소 주변 쓸고 닦고, 청소기로 낙엽도 싹 밀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씨의 하루 일과였다. 유가족들은 매일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그리고 오후 9시까지 아침저녁 교대로 분향소와 천막을 지킨다. 추모객들에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보라색 리본을 나눠주는 일을 한다. 이들이 매일 같이 분향소에 나오는 이유를 묻자 한 유가족으로부터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들 분향소에 나오지요. 유가족들한테는 나라가 없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이 더는 안 생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싸우고 행동하는 거죠. 다음 달에 총선이 있는데, 우리가 다시 진상규명을 시작할 수 있는 선거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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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에서 김화숙(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현수씨 어머니)씨가 아들 현수씨의 영정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 ⓒ 복건우

 
이날 목동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에 가기 전 분향소에 들른 김화숙(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현수씨 어머니)씨도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수의 국회의원만 관심을 가질 뿐 여당이든 야당이든 유가족들의 의견을 제대로 대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 현수씨의 영정을 두 손으로 감싼 김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윤석열 정부도 비상식적이지만, 180석 가까운 야당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도 참 답답해요. 여야 합의를 위해 유가족들이 양보했는데도 특별법 제정이 무산됐잖아요. 그런데도 미안하다는 말 한 번 못 들어봤어요. 특별법 생각만 하면 늘 이렇게 눈물이 먼저 앞서요."

김씨를 비롯한 유가족이 희생자들을 대신해 삭발과 오체투지 등을 벌인 끝에 지난 1월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같은 달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법안은 국회로 되돌아갔다. 다시 재의결 관문을 넘으려면 재적 국회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한데, 현재 여당이 반대하고 있어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여야는 총선 이후 특별법을 재표결하기로 잠정 합의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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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 앞에 '10·29 이태원 참사 기억리본 무료 나눔합니다. 가방에 하나씩 달고 기억해 주세요'라고 적힌 흰 종이와 함께 이태원 참사를 상징하는 보라색 리본이 가득 든 바구니가 놓여 있다. ⓒ 복건우

 
이날 몇몇 시민들은 분향소를 직접 찾거나 짧은 시간이라도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애도를 전했다. 편지를 쓰고, 향을 올리고, 영정 앞에서 기도하던 이들 또한 유가족과 생각이 비슷했다.
 
분향소에서 묵념을 하고 보라색 리본을 챙겨 간 목영만(49)씨는 "녹사평역에서 서울광장으로 분향소가 옮겨온 이후 지나갈 때마다 추모하러 온다. 얼마 전 참사 발생 후 500일째 되는 날이었는데 뉴스에는 잘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며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는 정치 성향을 떠나서 절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분향소에 한 발짝 떨어져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던 김은주(57)씨는 "이렇게라도 이태원 참사를 기록하고 싶었다"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정부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 참사의 진실을 덮어두고 할 일을 미루는 정부에 왜 유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호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시민을 위한 정부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10분 넘게 분향소에 놓인 영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기도한 안아무개(70대)씨는 "의정부에서 서울에 올 때마다 분향소에 들른다"라며 "10년 전 세월호로 희생당한 아이들을 기억하고 행동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또래들이 이태원 참사로 또다시 하늘의 별이 됐다. 그런데도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왜 아이들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냐"고 분노했다.

이태원 시민들 "진상규명 시작조차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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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던 서울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지나가는 시민들이 참사 1주기를 맞아 설치된 추모 게시판을 흘깃 쳐다보고 있다. ⓒ 복건우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20m 정도 떨어진 그 골목은 전보다 발길이 줄어 한산했다. 해밀톤호텔 옆 참사가 발생한 장소였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이곳에는 추모 설치물(10·29 기억과 안전의 길 표지판, 게시판, 바닥 표지석)이 만들어졌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게시판을 보기 위해 골목 초입에 잠깐 멈춰 서거나, 참사 현장인 걸 알고는 일부러 골목을 피해 돌아가기도 했다. 모두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 시민들은 분향소와 마찬가지로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정부의 무능한 대응"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4월 총선이 이태원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기준점이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안욱현(37)씨는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골목의 추모 설치물을 한참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역사모임(지도에역사를새기는사람들) 대표이기도 한 안씨는 "이태원 참사라는 역사의 현장을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며 "다음 달 총선은 이태원 참사 문제를 해결하는 선거여야 한다. 용산구청장, 경찰청장, 국무총리 등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진상규명을 쉬쉬하고 넘어가는 정권에 대한 심판 결과가 이번 총선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골목 가운데 있는 3개의 게시판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서지현(51)씨는 "참사 당일 이곳에 사람들이 몰릴 걸 알면서도 경찰이 제대로 배치되지 않았다. 지금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이 희생자들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만 많다"며 "총선을 한 달 앞둔 지금 진상규명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는 책임자 몇 명 자르고 끝낼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촌으로 가는 길에 이곳 골목을 지나던 정도연(26)씨도 "친구가 참사 발생 한두 시간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되돌아갔단 얘길 듣고 놀라서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이 희생된 게 생각나서 들르게 됐다"며 "정부는 참사가 발생하면 항상 몇 명의 잘못으로 몰아가며 무마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태원 참사 문제가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립적인 특조위, 사회적 참사 상설기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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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특별법에 대한 재의요구안이 지난 1월 3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가운데, 청사 정문에서 유가족들이 대통령 거부권에 반대하며 즉각 공포를 촉구하고 있다. ⓒ 권우성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참사 원인과 책임 소재 규명을 위해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구성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희생자 명예 회복과 추모사업, 피해자 지원 등도 담겼다. 그러나 정부는 특조위의 과도한 권한, 공정성과 중립성 확보의 어려움,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들며 윤 대통령에게 특별법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고, 대통령은 끝내 특별법을 거부했다.

특별법을 외면하고 막말을 서슴지 않은 정치인들도 있었다. 80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2024 총선시민네트워크'가 지난 2월 발표한 공천 반대 명단에는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폄훼한 후보자로 박대출 국민의힘 의원("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물타기 특별법"),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이태원 사고 당일 광화문에서 열린 정권 퇴진 촉구 대회에 서울 시내 모든 경찰 기동대가 투입됐다")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 거부권의 헌법적 한계를 명문화하겠다는 정치개혁안을 공약했다. 앞서 이태원 참사 특별법, 양곡관리법, 노란봉투법 등 9개 법안을 거부한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제동을 걸겠다는 취지다. 조국혁신당도 총선을 앞두고 이태원 참사의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다.

이창민(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이태원 참사 태스크포스 소속) 변호사는 "특별법에서 여야가 특조위원을 각각 4명씩 추천하도록 하는 등 기계적 중립이 지켜졌음에도 정부는 공정성과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설득력 없는 논거를 들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 필요한 건 기계적 공정을 지키기 위한 여야 동수의 추천 위원이 아니라 국회 합의를 통해 정부로부터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갖춘 특조위를 탄생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해 이 변호사는 "22대 국회에서는 특별법 재의결과 더불어 사회적 참사 및 재난의 진상규명을 위한 상설기구를 만드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또 다른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각 분야의 특별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을 양성해 이들이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독립적인 연구와 조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태원 유가족은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약속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 등 재난 참사 피해자들은 2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생명안전 3대 과제(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권고 이행, 생명안전기본법 제정)를 발표하며 생명존중과 안전사회를 지향하는 22대 국회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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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던 서울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 초입에 '우리에겐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표지석이 바닥에 박혀 있다. ⓒ 복건우

#이태원참사 #특별법 #거부권 #유가족 #분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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