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지혜의 날에 학생들이 <오이디푸스 왕> 연극을 준비하여 무대에 올렸다. 2023년 6월, '지혜의 날'에 학생들이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이와 연계하여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
추교준
방학이 되어도 여러 가지 독서모임이 이어진다. 모임에 미리 신청한 학생들이 각자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각자 읽고 난 생각들, 자기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이야기한다("방학에 소설 3권 읽기"). 저녁이 되면 부모들이 같은 방식으로 고전 작품을 읽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에 머물러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어느새 인간답게 사는 이야기나 좋은 부모 노릇에 대한 고민들을 두런두런 나누기도 한다("학교 밖 독서세미나").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독서 관련 활동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이런 장면을 보다 보면, 개인적으로는 1년 반 동안 고생해서 만든 계획서가 학교 구석에 잠들어 있다고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다. 계획이 촘촘하지 않다고 해서 공부가 흐지부지한 것은 아니다. 지혜학교의 독서교육은 꽉 맞물려 있는 단단한 구조물이 아니라, 얼기설기 느슨한 그물망으로 펼쳐져 있다.
만일 이곳이 사교육 시장에서의 교습소처럼 '기능적으로' 독서력을 올려야 하는 곳이라면, 교사들은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제시하고 당근과 채찍을 손에 흔들며 정해진 목적을 향해 수업을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의 성취 수준이 어떤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한 뒤에 잘하는 것은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은 노력하라는 지도를 할 것이다. 원하는 성과를 얻으면, 학생도 부모도 '이 학교는 투자 대비 수익이 잘 나는 곳이구나'하며 흡족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런 교육은 불가능하다. 앞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지혜학교는 각각의 학생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터전이다. 100여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6년 동안 빡빡한 학습 계획을 적용하기 힘든 여건이다. 이는 마치 가정에서 오랫동안 다수의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스파르타식 입시 기숙학원에서처럼) 강도 높은 공부를 시키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지혜학교에서는 '100여 명의 제각기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6년간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강요하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학교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있다. 학교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독서활동들, 지혜학교의 독서교육이라는 그물망을 넓게 펼쳐 놓으면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시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집어 들겠지' 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2023년 9월 기초과정(중1, 2) 학생들이 백일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23년 9월 기초과정 학생들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을 읽고 백일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혜학교
3.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독서교육에서 개인의 자발성이나 동기를 강조하며 커리큘럼을 자유롭게 펼쳐 놓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개개인의 문해력의 수준이 너무 들쭉날쭉 하지 않을까?' 이에 어느 고2 학생의 고민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이번 글을 마칠까 한다.
"쌤, 제가요, 사실 읽고 쓰는 일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지난 5년 동안 요리조리 피해서 어떻게든 도망 다녔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책 읽고 글 쓰는 인문반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2017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고3으로 올라가는 한 학생이 쭈뼛쭈뼛 어렵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 친구가 무서워하는 곳은 바로 '인문반'이다. 특히 인문반의 '철학 수업'은 학생들에게는 졸업 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골짜기'와 같다.
인문반 철학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매주' 철학 책을 읽고, 스스로 주제를 설정하여 한 편의 글을 써낸 뒤 교사의 피드백을 받는다. 그 일을 1년 내내 반복한다(인문반 철학 수업에 대해서는 조만간 상세히 다룰 것이다). 수능 준비를 하거나 다른 진로를 위해 외부학습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학생들은 모두 인문반을 선택한다. 5년 동안 천둥벌거숭이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학생들이 글로 된 감옥에 갇혀 매주 머리를 쥐어뜯는다.
매주 글을 써내기 위해서 학생들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책 읽는 기술, 글 쓰는 기법 등이 아니다. 바로 들쑥날쑥한 경험들이다. 자유분방한 생각들이다. 자기 생각을 말과 글로 드러낼 때, 눈치 보지 않는 편안한 마음이다. 고2 때까지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감정과 자기 안에 맺히는 생각을, 누가 평가할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편하고 자유롭게 드러내고 다양하게 표현하는 경험을 충분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학교에서는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텍스트로 쌓는 일'을, 빡빡한 커리큘럼이 아니라 '환경'과 '문화'의 형태로 느슨하게 펼쳐져 있는 독서교육이 넉넉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 지혜학교의 여러 교육과 활동들은, 마치 어느 성경 구절처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사족) 앞서 소개했던 그 학생은 결국 수개월 간 울며 불며 글 쓰려고 몸부림쳤다.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늦은 가을의 어느 수업 시간에 드디어 한 편의 글을 제대로 써냈다. 나는 그 학생의 글을 받아 들고 끝까지 읽은 뒤, 자리에서 일어서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박수를 받던 그 학생의 표정이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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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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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학교에서는 어떻게 읽고, 생각하고,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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