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모녀상. 군경이 초토화작전을 벌이던 1949년 1월 6일 젖먹이 딸을 안고 피신하다가 토벌대의 총에 맞아 눈밭에서 희생된 봉개동 주민 변병생 모녀를 모티브로 조각됐다.
임소현
4.3의 또 다른 원인 제공자 '언론'
'제주4.3'은 거칠게 요약하면, 불과 30정의 구식 총을 가진 300명의 무장대를 소탕하려다가 3만 명의 제주도민을 죽이는 '대학살'로 비화한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대립, 제주도를 반공정책의 상징으로 삼아 본때를 보이려던 미군정의 강박감,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정국 주도권을 쥐려던 이승만의 야욕과 실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 군경 출신 지휘부와 서북청년단이 주도하는 토벌대의 잔인무도한 초토화 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해가 복합 요인으로 상승작용을 했다.
그러나 2년 반 동안 4.3항쟁에 관한 책과 보고서 40여 권을 읽고, 당시 기사와 자료를 찾아보고, 진상규명을 위해 애쓴 취재기자와 유족 등을 인터뷰하면서 내린 결론은 '언론이 또 다른 핵심 원인 제공자였다'는 사실이다. 해방정국에서 주류 중앙언론은 진실보도는커녕 이념과 정파를 대변해 가짜뉴스를 조작해낸 혐의가 짙다.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었던 셈이다.
여운형 같은 중도·좌파는 물론 김구·김규식 같은 우익 세력마저 단독선거에 반대했기에 이승만과 보수파인 한민당 세력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제주도민을 대변해줄 정치세력은 없었다.
언론마저 침묵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대부분 도민은 목숨을 건지려고 한라산으로 대피했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몰리면서 대학살의 과녁이 되고 말았다. 제주도 산하에는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고 거의 전역이 공동묘지가 됐다. 대개는 이유를 묻지 않고 죽였고 이유 없이 죽었다. 이유가 있다면 그저 증오심과 보복심 그리고 무지의 소산이었다. 사적 보복을 막아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보복을 부추기고 집행했다.
운명처럼 빠져든 4.3 진실 보도
이번 취재에 특히 많은 도움은 준 이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 양조훈(76) 위원과 제주4.3평화재단 김종민(63) 이사장이다. 양 위원은 1988년 <제주신문>이 4.3특별취재반을 구성할 때 반장이었고 김 이사장은 7개월 된 신입기자였으나, 둘 다 운명처럼 뛰어든 4.3 관련 진실 보도를 계기로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 등에 36년 반평생을 바쳤다.
1989년 4월 3일에 맞춰 <제주신문>에 첫 기사를 선보인 연재기사 '4.3의 증언'은 57회를 내보낸 뒤 '제주신문 사태'를 겪으면서 중단됐다. 전두환 세력의 지원을 받은 경영주가 언론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던 기자들과 갈등이 심해지자 폐업을 해버린 것이다. 해직기자들은 도민주 공모로 1990년 6월 2일 <제민일보>를 만들어 창간호부터 '4.3은 말한다'로 제목을 바꿔 연재를 재개했다.